시민이 투자한 500만 원, 영월과 옥천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2025년 12월 4일, 사회적가치투자SIR대회에서 시민 청중심사단의 선택은 실제 투자금이 되었습니다. 시민들이 모의투자로 선택한 500만 원은 강원 영월 ‘스튜디오 어중간’ 김가현 대표의 청년 창작자 레지던스 ‘굴(Guul)’과 충북 옥천 ‘누리:사’ 박누리 대표의 농촌자치 아카이브로 향했는데요. 연재 시리즈 〈오프 더 레코드: 무대가 끝나고 난 뒤〉는 SIR대회 이후, 두 소셜디자이너의 실험이 어떻게 이어졌는지, 그리고 시민의 투자가 어떤 변화를 만들었는지 현장의 목소리로 전합니다.
2화. 옥천 들녘에서 띄우는 편지: 다르게 벌고, 다르게 살아가려는 실험
다르게 벌고 다르게 살아가려는 실험 한 조각
안녕하세요, 희망제작소 독자 여러분. 옥천에서 두 번째 편지를 보냅니다. 지난 5월, 15년간 정들었던 일터를 떠나 홀로서기를 시작하며 보냈던 첫 번째 편지 <멈추는 용기, 연결을 벌기로 했다>를 기억하시나요? 막 여름이 시작되던 길목이었는데, 어느새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반가운 늦여름이 되었습니다.
퇴사 당시 저는 조금 낭만적인 실험을 꿈꿨더랍니다. 큰 수입이 없더라도 마을과 사람, 연대의 관계망을 통해 먹고사는 ‘화폐경제 밖의 삶’을 살아보고 싶었거든요. 매달 통장에 찍히는 월급 대신 마을 일을 거들고 농산물을 얻거나 사업계획서를 손봐드리고 밥 한 끼를 얻어먹으며 ‘관계’로 살아보는 삶 말이죠. 돌봄과 생태, 자치와 자급이라는 가치를 지면을 통해 줄곧 외치면서도, 여전히 화폐경제의 문법 안에 있는 제 삶이 내내 마음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거대한 자본주의 시장의 톱니바퀴에서 조금 비켜나, 그 밖에서도 살아갈 수 있음을 스스로 증명해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삶은 계획대로 흘러가지만은 않지요. 저를 붙잡은 건 다름 아닌 ‘집’ 문제였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충북 옥천의 심각한 전세난이 이 실험에 제동을 건 것입니다.
전셋집을 나오며 깨달은, 삶을 자치한다는 것
농어촌기본소득 시범지역으로 선정된 이후 옥천의 전세 시장은 눈에 띄게 얼어붙었습니다. 마침 10년을 살던 전셋집을 비워줘야 했던 저로서는 꽤나 난감한 상황이었죠. 외지 유입 인구 증가와 함께 기존 주민들 역시 이사를 꺼리면서 매물이 완전히 말라버렸다는 부동산 중개인들의 설명대로, 수개월 동안 발품을 팔았지만 마땅한 집을 찾을 수 없었어요. 간혹 나오는 전세는 신축 아파트뿐이었는데, 이는 오래된 아파트 매매가를 크게 웃도는 금액이었습니다. 그렇게 계약 만료를 불과 한 달 반 남겨 두고, 결국 구축 아파트를 자가로 매입하게 됐어요. 누군가는 ‘왜 하필 오래된 집을 샀냐’고 할지 모르지만, 제게는 드디어 ‘쫓겨날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온전한 내 공간이 생긴 셈입니다.
원래 저는 차와 집은 소유하지 않아도 된다는 소신을 품고 살았습니다. 옥천에 정착하며 어쩔 수 없이 면허를 따고 16년 차 운전자가 되었지만, 집만큼은 평생 임대로 살며 ‘부동산을 가지려 아등바등하지 않고도 잘 살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집이 생기고 나니, 오랜 주거 불안에서 벗어나며 찾아오는 거대한 안도감을 부정할 수 없더라고요. 그러나 이 안도감은 역설적으로 무거운 질문을 던져줍니다. 모두가 (빚을 내어) 집을 사야만 안정을 얻을 수 있는 사회가, 과연 건강한 사회일까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삶을 스스로 결정하는 자치는 개인의 부동산 소유가 아니라, 집이 없어도 삶이 흔들리지 않는 사회적 조건 위에서 가능할 겁니다. 주거 안정 역시 ‘자치’의 중요한 기반임을 새삼스레 돌아봤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는 ‘자치’와 얼마나 멀리 있는지도요. 실제로 농촌에 살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입니다. 면 단위 작은 마을에 단 5~10채의 공공임대주택만 들어서도 사람들이 이주해 오고, 일자리가 생기며, 마을의 숙원 사업이 해결될 수 있을 거라고요. 내 삶을 스스로 다스리는 ‘읍면자치’의 출발점엔, 누구나 안심하고 머물 수 있는 기본적인 주거 안전망을 마을 안에 함께 놓는 일도 있음을요.
가진 돈을 탈탈 털어 ‘홈 스윗 홈’을 마련한 덕에, 당초 계획과 달리 화폐경제에 계속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 되긴 했습니다. 하지만 방향은 바꾸지 않기로 했어요. 수익이 적거나 없더라도 의미가 있고 배울 수 있는 일이라면 망설임 없이 제 시간을 쓰기로요.

10년 살아온 전셋집을 떠나 마련한 첫 ‘내 집’. 이사 직후 방문한 손님 옆에서 의젓하게 앉아있는
반려묘 맑스(15)와 그 뒤로 보이는 정리하지 못한 책더미 ⓒ박누리
‘누구누구의 헌신’ 말고
올 하반기(아마도 연말 즈음) 본격적으로 ‘읍면자치 아카이빙’ 작업을 시작하려고 해요. 농어촌기본소득 시범사업 실시 이후 농어촌의 지속가능성에 쏟아지는 관심이 부쩍 높아졌습니다. 그만큼, 오래 지역을 지켜온 이들에게 ‘읍면자치’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질문이자, 따라가야 할 깃발이 되고 있고요.
그동안 농어촌에 적지 않은 공공 예산이 투입됐음에도 주민들이 체감하는 효능감이 낮았던 이유는, 모든 사업에 주민의 목소리가 온전히 담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단순한 의견 수렴을 넘어, 지역의 살림과 일상을 주민이 직접 기획하고 이끌어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지금까지 우리가 이해해온 주민자치 수준을 뛰어넘어, 내 삶의 실질적 공간을 기반으로 한 ‘읍면자치’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한 연습과 학습이 지금 농어촌에는 절실히 필요합니다.
지난해 사회적가치투자SIR대회에서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전국 곳곳에는 주민 스스로 살림과 돌봄을 지혜롭게 꾸려온 현장이 꽤 많습니다. 다만 기존 미디어가 이들을 다뤄온 방식에는 한계가 있었지요. 농촌 사회 구조나 시스템보다 ‘사람’이나 ‘공동체 활동’의 겉면만 다루다 보니 겉핥기에 그치기 일쑤였고, 때로는 특정 활동가의 ‘눈물겨운 헌신’이나 영웅적인 서사로만 소비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현장에 ‘누가 있는가’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지만 자치가 한 사람의 헌신에 기대지 않고 지속되려면, 그것을 가능하게 한 전제와 배경, 제도와 구조까지 함께 들여다봐야 합니다. 어떤 회의 구조를 거쳤는지, 갈등은 어떻게 풀었는지, 공공자원과 마을 기금은 어떻게 운용했는지. 이런 뼈대를 구체적으로 기록해야 다른 지역도 참고하고 응용할 수 있습니다.
올해 이곳저곳을 다니며 만난 농촌 활동가들에게 이 구상을 건넬 때마다 깊은 공감을 얻었습니다. 12월부터 내년 3월까지는 집중적으로 전국 각지의 자치 현장을 찾아 그 구조와 맥락을 기록할 계획입니다. 아마 그 시작은 제가 살고 있는 옥천, 혹은 최근 들어 더욱 활발한 자치 활동이 이어지고 있는 순창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모두의 인문학 - 농촌, 사유의 최전선> 프로그램 중 하나인 ‘그림책으로 보는 철학 이야기(옥천 타라북스)’ 진행 장면 ⓒ박누리
이 기록의 밑거름이 된(될) 배움과 연대의 시간
지난 몇 달, 제 활동들도 이 아카이빙을 위한 학습이자 탐색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그중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몇 가지 활동을 소개합니다. 우선 대통령직속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 산하 ‘농어촌형 주민자치 기반 거버넌스 구축 TF’ 위원으로 참여하며 전국의 연구자, 활동가들과 함께 풀뿌리 읍면자치의 현주소를 짚고 대안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뜻깊은 자리에 함께하게 돼, 줄곧 ‘배운다’는 마음으로 임하는 중입니다.
충북 청주의 사회운동단체인 ‘삶과노동을잇는배움터 이짓’과 함께 <지역정의> 시리즈 강연을 기획하기도 했는데요. 저는 2회차 강의 ‘햇빛소득은 농촌을 살릴 수 있는가’를 맡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이 시리즈 강연은 수도권에서도 찾아올 만큼 호응을 얻어 현재 후속 학습 모임을 준비 중입니다. 일회성 학습을 넘어 지속적인 행동으로 이어질 계기가 되지 않을까, 저 역시 무척 기대 중입니다.

농어촌형 주민자치 기반 거버넌스 구축TF(좌), ‘지역정의 시리즈 강연’ (중), ‘농촌, 사유의 최전선’ 등 기록의 밑거름이 된(될) 배움과 연대의 시간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박누리
비영리활동가학교 엣지의 ‘로칼리지’ 기획단이자 사회자로 함께하고 있기도 해요. 강연자 사전 인터뷰도 맡게 돼 저에게는 더욱 의미 있는 배움이 되고 있습니다. 현장의 고민을 나눠주시는 강연자분들, 그리고 눈을 빛내며 그 이야기를 듣는 참여자 분들에게 매번 깊은 감동을 받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농촌유토피아연구소 의뢰로 총괄 기획한 <모두의 인문학: 농촌, 사유의 최전선> 프로그램 역시 전국 5개 지역, 9개 연계시설에서 막을 올렸고요. 농촌이라는 공간을 시혜나 소외의 대상이 아니라, 내 삶의 자리에서 공동체와 함께 깊이 사유할 수 있는 ‘최전선’으로 재인식했으면 하는 바람을 담은 프로그램이에요. 내 일상을 인문학과 접목하며, 주민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되는 자치를 연결해보려는 시도이기도 했습니다.
기자협회보와 시사인을 통한 칼럼 기고도 계속 하고 있어요. 때마다 제가 눈길을 두고 있는 지역 이슈를, 농촌과 접점이 많지 않은 독자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쓰고 싶은 마음인데……. 희망제작소 독자님들께서도 기회가 되면 살펴봐주세요! 최근에는 지역재단 웹진 <민위방본>에 ‘지방소멸 담론을 넘어 ‘장소 살림’의 미래로 - 읍면자치와 협동공동체의 다차원적 지평’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기고하기도 했습니다.

지역재단 웹진<민위방본>에 ‘지방소멸 담론을 넘어 ‘장소 살림’의 미래로-읍면자치와 혐동공동체의 다차원적 지평’을 기고했습니다 ⓒ박누리
그래서 무엇으로 먹고사느냐 물으신다면
종종 주변에서 물으십니다. “그래서 요즘 대체 뭘로 먹고사냐”고요.
글쓰기, 에디터 교육, 기자단 교육 등 강의 요청이 오면 기쁘게 달려갑니다. 기획 자문을 하기도 하고, 직접 인터뷰·취재 활동을 하기도 해요. 현장에서 벼려온 노하우를 나눌 수 있는 참 고마운 수입원이기도 합니다. 다행히 찾아주시는 곳들이 있어 다행히 밥은 굶지 않아요(웃음). 글쓰기나 에디터 교육, 관련 컨설팅이나 기획이 필요한 곳이 있다면 언제든 편하게 불러주세요!
특히 7월부터 9월까지는 밀양소통협력센터 의뢰로 주민 대상 로컬에디터 양성 교육인 <여름의 이야기 수집가>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유난히 무더운 올 여름, 매주 열정적으로 지역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기록하는 주민들의 모습에서 ‘기록하는 사람’의 초심을 되새깁니다. 주민이 직접 자신의 눈으로 지역을 보고 담아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기초적인 자치활동이기도 하지요. 두 달 간의 여정은 오는 9월 12일 최종 활동 공유회로 결실을 맺게 됩니다.
하반기에는 뜻깊은 자리가 하나 더 기다리고 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청년인문교실 - 문화자유교실’의 현장 운영 기획자로 선정되어, 청년들이 지역에 머물며 ‘기록’과 ‘자치’라는 키워드로 자신의 삶을 비춰보고 미래를 모색하도록 돕는 활동을 준비하고 있어요. ‘시골언니프로젝트’ 등으로 지역 체류 활동을 운영해본 경험이 있는데요. 그때와는 또 다른 방향으로, 지역을 통해 ‘나’를 성찰하고 이해하는 시간을 만들어 보려 합니다. 이 소식도 조만간 구체적으로 알려드릴 수 있을 거 같아요.

스튜디오 ‘누리:사’의 로고를 만드는 작업도 진행 중인데요. 메인 컬러는 아직 고민 중이라 무지개색 버전으로 공유드려 봅니다. ⓒ박누리
편지를 마치며 : 관계와 배움을 축적하는 삶
화폐경제를 완전히 벗어나는 실험은 잠시 유예됐지만, 여전히 저는 '관계'를 벌고 '배움'을 축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개인의 헌신에 기대는 낭만주의를 넘어, 지역이 스스로 작동하게 만드는 튼튼한 시스템을 기록하는 일. 올 연말 본격적으로 펼쳐낼 '읍면자치 아카이빙'의 여정에, 희망제작소 독자 여러분의 관심과 응원을 부탁드립니다.
작고 촘촘한 자치 현장이 도시의 여러분에게도 삶을 다르게 볼 수 있는 균열이자 온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또 다음 소식 전해 드릴 때까지 모두 안녕!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2026년 8월 옥천에서, 박누리 드림
| 박누리 콘텐츠 스튜디오 ‘누리:사’ 대표
2010년부터 충북 옥천을 거점으로 옥천신문 기자, 월간 옥이네 편집장으로 활동하며, 지역의 삶을 기록하는 ‘99%를 위한 로컬 아카이빙’에 집중해왔다. 이 과정에서 만난 사람과 공동체의 필요에 응답하고자, 다양한 지역 의제를 문화적 실험으로 풀어내는 문화기획을 병행했다. 최근 독립 스튜디오를 설립해 특정 영역에 갇히지 않고 로컬의 다채로운 매력과 지속가능한 솔루션을 발굴하는 다각도의 프로젝트를 전개 중이다. 올해 초에는 읍면 자치 현장의 사례를 엮은 단행본 『한 권으로 이해하는 읍면자치』 발간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현재는 기후위기, 노동, 자치 등 로컬의 다양한 질문을 아카이빙과 콘텐츠 기획으로 풀어내는 데 집중하고 있다. 기록자이자 문화기획자, 지역에 필요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경계 없이 수행하는 현장 활동가다. |
시민이 투자한 500만 원, 영월과 옥천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2025년 12월 4일, 사회적가치투자SIR대회에서 시민 청중심사단의 선택은 실제 투자금이 되었습니다. 시민들이 모의투자로 선택한 500만 원은 강원 영월 ‘스튜디오 어중간’ 김가현 대표의 청년 창작자 레지던스 ‘굴(Guul)’과 충북 옥천 ‘누리:사’ 박누리 대표의 농촌자치 아카이브로 향했는데요. 연재 시리즈 〈오프 더 레코드: 무대가 끝나고 난 뒤〉는 SIR대회 이후, 두 소셜디자이너의 실험이 어떻게 이어졌는지, 그리고 시민의 투자가 어떤 변화를 만들었는지 현장의 목소리로 전합니다.
2화. 옥천 들녘에서 띄우는 편지: 다르게 벌고, 다르게 살아가려는 실험
안녕하세요, 희망제작소 독자 여러분. 옥천에서 두 번째 편지를 보냅니다. 지난 5월, 15년간 정들었던 일터를 떠나 홀로서기를 시작하며 보냈던 첫 번째 편지 <멈추는 용기, 연결을 벌기로 했다>를 기억하시나요? 막 여름이 시작되던 길목이었는데, 어느새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반가운 늦여름이 되었습니다.
퇴사 당시 저는 조금 낭만적인 실험을 꿈꿨더랍니다. 큰 수입이 없더라도 마을과 사람, 연대의 관계망을 통해 먹고사는 ‘화폐경제 밖의 삶’을 살아보고 싶었거든요. 매달 통장에 찍히는 월급 대신 마을 일을 거들고 농산물을 얻거나 사업계획서를 손봐드리고 밥 한 끼를 얻어먹으며 ‘관계’로 살아보는 삶 말이죠. 돌봄과 생태, 자치와 자급이라는 가치를 지면을 통해 줄곧 외치면서도, 여전히 화폐경제의 문법 안에 있는 제 삶이 내내 마음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거대한 자본주의 시장의 톱니바퀴에서 조금 비켜나, 그 밖에서도 살아갈 수 있음을 스스로 증명해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삶은 계획대로 흘러가지만은 않지요. 저를 붙잡은 건 다름 아닌 ‘집’ 문제였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충북 옥천의 심각한 전세난이 이 실험에 제동을 건 것입니다.
농어촌기본소득 시범지역으로 선정된 이후 옥천의 전세 시장은 눈에 띄게 얼어붙었습니다. 마침 10년을 살던 전셋집을 비워줘야 했던 저로서는 꽤나 난감한 상황이었죠. 외지 유입 인구 증가와 함께 기존 주민들 역시 이사를 꺼리면서 매물이 완전히 말라버렸다는 부동산 중개인들의 설명대로, 수개월 동안 발품을 팔았지만 마땅한 집을 찾을 수 없었어요. 간혹 나오는 전세는 신축 아파트뿐이었는데, 이는 오래된 아파트 매매가를 크게 웃도는 금액이었습니다. 그렇게 계약 만료를 불과 한 달 반 남겨 두고, 결국 구축 아파트를 자가로 매입하게 됐어요. 누군가는 ‘왜 하필 오래된 집을 샀냐’고 할지 모르지만, 제게는 드디어 ‘쫓겨날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온전한 내 공간이 생긴 셈입니다.
원래 저는 차와 집은 소유하지 않아도 된다는 소신을 품고 살았습니다. 옥천에 정착하며 어쩔 수 없이 면허를 따고 16년 차 운전자가 되었지만, 집만큼은 평생 임대로 살며 ‘부동산을 가지려 아등바등하지 않고도 잘 살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집이 생기고 나니, 오랜 주거 불안에서 벗어나며 찾아오는 거대한 안도감을 부정할 수 없더라고요. 그러나 이 안도감은 역설적으로 무거운 질문을 던져줍니다. 모두가 (빚을 내어) 집을 사야만 안정을 얻을 수 있는 사회가, 과연 건강한 사회일까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삶을 스스로 결정하는 자치는 개인의 부동산 소유가 아니라, 집이 없어도 삶이 흔들리지 않는 사회적 조건 위에서 가능할 겁니다. 주거 안정 역시 ‘자치’의 중요한 기반임을 새삼스레 돌아봤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는 ‘자치’와 얼마나 멀리 있는지도요. 실제로 농촌에 살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입니다. 면 단위 작은 마을에 단 5~10채의 공공임대주택만 들어서도 사람들이 이주해 오고, 일자리가 생기며, 마을의 숙원 사업이 해결될 수 있을 거라고요. 내 삶을 스스로 다스리는 ‘읍면자치’의 출발점엔, 누구나 안심하고 머물 수 있는 기본적인 주거 안전망을 마을 안에 함께 놓는 일도 있음을요.
가진 돈을 탈탈 털어 ‘홈 스윗 홈’을 마련한 덕에, 당초 계획과 달리 화폐경제에 계속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 되긴 했습니다. 하지만 방향은 바꾸지 않기로 했어요. 수익이 적거나 없더라도 의미가 있고 배울 수 있는 일이라면 망설임 없이 제 시간을 쓰기로요.
10년 살아온 전셋집을 떠나 마련한 첫 ‘내 집’. 이사 직후 방문한 손님 옆에서 의젓하게 앉아있는
반려묘 맑스(15)와 그 뒤로 보이는 정리하지 못한 책더미 ⓒ박누리
올 하반기(아마도 연말 즈음) 본격적으로 ‘읍면자치 아카이빙’ 작업을 시작하려고 해요. 농어촌기본소득 시범사업 실시 이후 농어촌의 지속가능성에 쏟아지는 관심이 부쩍 높아졌습니다. 그만큼, 오래 지역을 지켜온 이들에게 ‘읍면자치’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질문이자, 따라가야 할 깃발이 되고 있고요.
그동안 농어촌에 적지 않은 공공 예산이 투입됐음에도 주민들이 체감하는 효능감이 낮았던 이유는, 모든 사업에 주민의 목소리가 온전히 담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단순한 의견 수렴을 넘어, 지역의 살림과 일상을 주민이 직접 기획하고 이끌어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지금까지 우리가 이해해온 주민자치 수준을 뛰어넘어, 내 삶의 실질적 공간을 기반으로 한 ‘읍면자치’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한 연습과 학습이 지금 농어촌에는 절실히 필요합니다.
지난해 사회적가치투자SIR대회에서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전국 곳곳에는 주민 스스로 살림과 돌봄을 지혜롭게 꾸려온 현장이 꽤 많습니다. 다만 기존 미디어가 이들을 다뤄온 방식에는 한계가 있었지요. 농촌 사회 구조나 시스템보다 ‘사람’이나 ‘공동체 활동’의 겉면만 다루다 보니 겉핥기에 그치기 일쑤였고, 때로는 특정 활동가의 ‘눈물겨운 헌신’이나 영웅적인 서사로만 소비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현장에 ‘누가 있는가’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지만 자치가 한 사람의 헌신에 기대지 않고 지속되려면, 그것을 가능하게 한 전제와 배경, 제도와 구조까지 함께 들여다봐야 합니다. 어떤 회의 구조를 거쳤는지, 갈등은 어떻게 풀었는지, 공공자원과 마을 기금은 어떻게 운용했는지. 이런 뼈대를 구체적으로 기록해야 다른 지역도 참고하고 응용할 수 있습니다.
올해 이곳저곳을 다니며 만난 농촌 활동가들에게 이 구상을 건넬 때마다 깊은 공감을 얻었습니다. 12월부터 내년 3월까지는 집중적으로 전국 각지의 자치 현장을 찾아 그 구조와 맥락을 기록할 계획입니다. 아마 그 시작은 제가 살고 있는 옥천, 혹은 최근 들어 더욱 활발한 자치 활동이 이어지고 있는 순창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모두의 인문학 - 농촌, 사유의 최전선> 프로그램 중 하나인 ‘그림책으로 보는 철학 이야기(옥천 타라북스)’ 진행 장면 ⓒ박누리
지난 몇 달, 제 활동들도 이 아카이빙을 위한 학습이자 탐색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그중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몇 가지 활동을 소개합니다. 우선 대통령직속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 산하 ‘농어촌형 주민자치 기반 거버넌스 구축 TF’ 위원으로 참여하며 전국의 연구자, 활동가들과 함께 풀뿌리 읍면자치의 현주소를 짚고 대안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뜻깊은 자리에 함께하게 돼, 줄곧 ‘배운다’는 마음으로 임하는 중입니다.
충북 청주의 사회운동단체인 ‘삶과노동을잇는배움터 이짓’과 함께 <지역정의> 시리즈 강연을 기획하기도 했는데요. 저는 2회차 강의 ‘햇빛소득은 농촌을 살릴 수 있는가’를 맡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이 시리즈 강연은 수도권에서도 찾아올 만큼 호응을 얻어 현재 후속 학습 모임을 준비 중입니다. 일회성 학습을 넘어 지속적인 행동으로 이어질 계기가 되지 않을까, 저 역시 무척 기대 중입니다.
농어촌형 주민자치 기반 거버넌스 구축TF(좌), ‘지역정의 시리즈 강연’ (중), ‘농촌, 사유의 최전선’ 등 기록의 밑거름이 된(될) 배움과 연대의 시간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박누리
비영리활동가학교 엣지의 ‘로칼리지’ 기획단이자 사회자로 함께하고 있기도 해요. 강연자 사전 인터뷰도 맡게 돼 저에게는 더욱 의미 있는 배움이 되고 있습니다. 현장의 고민을 나눠주시는 강연자분들, 그리고 눈을 빛내며 그 이야기를 듣는 참여자 분들에게 매번 깊은 감동을 받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농촌유토피아연구소 의뢰로 총괄 기획한 <모두의 인문학: 농촌, 사유의 최전선> 프로그램 역시 전국 5개 지역, 9개 연계시설에서 막을 올렸고요. 농촌이라는 공간을 시혜나 소외의 대상이 아니라, 내 삶의 자리에서 공동체와 함께 깊이 사유할 수 있는 ‘최전선’으로 재인식했으면 하는 바람을 담은 프로그램이에요. 내 일상을 인문학과 접목하며, 주민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되는 자치를 연결해보려는 시도이기도 했습니다.
기자협회보와 시사인을 통한 칼럼 기고도 계속 하고 있어요. 때마다 제가 눈길을 두고 있는 지역 이슈를, 농촌과 접점이 많지 않은 독자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쓰고 싶은 마음인데……. 희망제작소 독자님들께서도 기회가 되면 살펴봐주세요! 최근에는 지역재단 웹진 <민위방본>에 ‘지방소멸 담론을 넘어 ‘장소 살림’의 미래로 - 읍면자치와 협동공동체의 다차원적 지평’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기고하기도 했습니다.
지역재단 웹진<민위방본>에 ‘지방소멸 담론을 넘어 ‘장소 살림’의 미래로-읍면자치와 혐동공동체의 다차원적 지평’을 기고했습니다 ⓒ박누리
그래서 무엇으로 먹고사느냐 물으신다면
종종 주변에서 물으십니다. “그래서 요즘 대체 뭘로 먹고사냐”고요.
글쓰기, 에디터 교육, 기자단 교육 등 강의 요청이 오면 기쁘게 달려갑니다. 기획 자문을 하기도 하고, 직접 인터뷰·취재 활동을 하기도 해요. 현장에서 벼려온 노하우를 나눌 수 있는 참 고마운 수입원이기도 합니다. 다행히 찾아주시는 곳들이 있어 다행히 밥은 굶지 않아요(웃음). 글쓰기나 에디터 교육, 관련 컨설팅이나 기획이 필요한 곳이 있다면 언제든 편하게 불러주세요!
특히 7월부터 9월까지는 밀양소통협력센터 의뢰로 주민 대상 로컬에디터 양성 교육인 <여름의 이야기 수집가>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유난히 무더운 올 여름, 매주 열정적으로 지역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기록하는 주민들의 모습에서 ‘기록하는 사람’의 초심을 되새깁니다. 주민이 직접 자신의 눈으로 지역을 보고 담아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기초적인 자치활동이기도 하지요. 두 달 간의 여정은 오는 9월 12일 최종 활동 공유회로 결실을 맺게 됩니다.
하반기에는 뜻깊은 자리가 하나 더 기다리고 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청년인문교실 - 문화자유교실’의 현장 운영 기획자로 선정되어, 청년들이 지역에 머물며 ‘기록’과 ‘자치’라는 키워드로 자신의 삶을 비춰보고 미래를 모색하도록 돕는 활동을 준비하고 있어요. ‘시골언니프로젝트’ 등으로 지역 체류 활동을 운영해본 경험이 있는데요. 그때와는 또 다른 방향으로, 지역을 통해 ‘나’를 성찰하고 이해하는 시간을 만들어 보려 합니다. 이 소식도 조만간 구체적으로 알려드릴 수 있을 거 같아요.
스튜디오 ‘누리:사’의 로고를 만드는 작업도 진행 중인데요. 메인 컬러는 아직 고민 중이라 무지개색 버전으로 공유드려 봅니다. ⓒ박누리
화폐경제를 완전히 벗어나는 실험은 잠시 유예됐지만, 여전히 저는 '관계'를 벌고 '배움'을 축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개인의 헌신에 기대는 낭만주의를 넘어, 지역이 스스로 작동하게 만드는 튼튼한 시스템을 기록하는 일. 올 연말 본격적으로 펼쳐낼 '읍면자치 아카이빙'의 여정에, 희망제작소 독자 여러분의 관심과 응원을 부탁드립니다.
작고 촘촘한 자치 현장이 도시의 여러분에게도 삶을 다르게 볼 수 있는 균열이자 온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또 다음 소식 전해 드릴 때까지 모두 안녕!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2026년 8월 옥천에서, 박누리 드림
박누리 콘텐츠 스튜디오 ‘누리:사’ 대표
2010년부터 충북 옥천을 거점으로 옥천신문 기자, 월간 옥이네 편집장으로 활동하며, 지역의 삶을 기록하는 ‘99%를 위한 로컬 아카이빙’에 집중해왔다. 이 과정에서 만난 사람과 공동체의 필요에 응답하고자, 다양한 지역 의제를 문화적 실험으로 풀어내는 문화기획을 병행했다. 최근 독립 스튜디오를 설립해 특정 영역에 갇히지 않고 로컬의 다채로운 매력과 지속가능한 솔루션을 발굴하는 다각도의 프로젝트를 전개 중이다. 올해 초에는 읍면 자치 현장의 사례를 엮은 단행본 『한 권으로 이해하는 읍면자치』 발간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현재는 기후위기, 노동, 자치 등 로컬의 다양한 질문을 아카이빙과 콘텐츠 기획으로 풀어내는 데 집중하고 있다. 기록자이자 문화기획자, 지역에 필요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경계 없이 수행하는 현장 활동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