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전문] 사회혁신, 더 큰 도전 | 하승창 한국사회가치연대기금 이사장

2026-08-26

희망제작소와 카카오가 함께 준비한 <대한민국 사회혁신 컨퍼런스 2026(SIC 2026)>이 지난 7월 14일 서울 중구 페럼타워에서 성황리에 마무리되었습니다. 이번 컨퍼런스는 희망제작소의 창립 2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한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사회혁신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다가올 미래를 함께 그린 기조강연 전문을 소개합니다. 


사회혁신, 더 큰 도전

하승창 한국사회가치연대기금 이사장



022ba4e6afee1.jpg

기조강연을 맡은 하승창 한국사회가치연대기금 이사장



사회혁신, 일상으로부터의 시작


희망제작소가 지난 20년 동안 만들어온 사회혁신의 역사를 돌아볼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례 중 하나는 ‘높낮이가 다른 지하철 손잡이’다. 과거 지하철 손잡이의 높이는 일률적으로 같았다. 이 때문에 키가 작은 사람이나 신체적 불편함이 있는 사람들은 손잡이를 잡기 어려웠다. 손잡이의 길이에 차이를 둠으로써 누구나 보다 편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한 변화는 지금 보면 당연해 보이지만, 당시에는 일상에서 쉽게 지나칠 수 있는 불편을 새롭게 바라본 시도였다.


이 사례는 당시로서는 낯설었던 ‘사회혁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사회혁신의 출발점에는 바로 ‘우리 삶 속 일상의 혁신’이 있었다. 1990년대까지 우리 사회에서는 일상의 혁신보다 사회의 큰 틀과 제도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더 많은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참여연대와 같은 대형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제도적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시민운동의 중요한 과제였다.


그런 점에서 일상에서 출발하는 작은 변화는 사회혁신의 관점에서 중요한 전환이었다. 지난 20년을 돌아보면 이러한 작은 변화가 더욱 큰 변화로 이어지는 출발점이 되었다. ‘불만합창단’이나 총리실 정책 제안 사례 역시 “작은 시도가 모여 큰 변화를 만든다”’는 가치를 담고 있다.


특히 인터넷과 디지털 기술이 고도로 발전한 사회에서는 하나의 작은 변화가 빠르게 복제되고 연결되며 확산될 수 있다. 내가 딛고 서 있는 자리에서 만들어낸 작은 변화가 사회 전체를 바꾸는 출발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과거에는 일상의 아기자기한 아이디어 정도로 여겨졌던 시도가 때로는 사회 전체를 움직이는 중요한 모멘텀이 되기도 한다. 이것이 사회혁신이 지지해온 중요한 기조 가운데 하나다.


1990년대 시민운동의 연장선에서 보면 이는 “한 사람의 아이디어와 세상을 바꾸려는 시도가 사회적 공감대를 얻을 때 세상이 바뀐다”는 메시지와도 연결된다. 제도 중심의 개혁에서 구체적인 삶의 공간을 변화시키는 실질적인 변화로 사회혁신의 영역이 확장된 것이다.


 

시민의 아이디어가 사회의 변화로


이후 진행된 ‘소셜이노베이션 캠프’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서 등장한 혁신적인 시도였다. 세상을 바꾸는 아이디어를 함께 모으고 이를 구체적인 대안으로 발전시키는 캠프를 운영하는 방식은 당시로서는 새로운 접근이었다.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시민사회를 조직화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도 이어졌다. ‘씽크카페 컨퍼런스’는 기존의 경직된 토론회나 공청회 방식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 가운데 하나였다. 현재는 이러한 방식이 보편적으로 활용되고 있지만 당시에는 기존의 토론과 공론 방식을 변화시키려는 실험이었다.


제도적 차원에서는 주민참여예산제의 확대가 대표적이다. 서울시의 ‘정책박람회’는 시민들의 다양한 의견을 직접 수렴하는 공론장으로 운영됐고, 이후 여러 지방자치단체와 정부에서도 이러한 방식을 다양한 형태로 적용했다. 문재인 정부 시절에는 ‘광화문 1번가’라는 창구가 운영됐다. 정부 인수위원회가 별도로 없었던 당시의 특수한 상황에서 단순한 민원을 넘어 시민들의 정책 제안을 수렴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구였다. 이후 광화문 1번가는 정부의 일상적인 소통 창구로 자리 잡았고, 코로나19 대유행 당시에는 시민들의 제안을 모아 마스크 수급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한 플랫폼의 토대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흐름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가 정책박람회였다. 정책박람회는 시민들을 어떻게 국정과 정책에 참여하게 할 것인지 점검하는 계기가 됐다. 시민사회에서는 최근 ‘빠띠’와 같은 플랫폼으로 이러한 방식이 진화하기도 했다. 변화하는 조건 속에서 시민들의 생각과 아이디어를 모으고, 그것이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해 실제 변화로 이어지도록 하는 플랫폼은 지속적으로 등장했다. 윤석열 정부 시기에 여러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이러한 흐름 자체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문재인 정부 시기에는 정책의 기획과 개척 단계까지 시민들이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기회도 만들어졌다.


이 모든 과정에는 시민 참여의 확장이라는 사회혁신의 흐름이 존재했다. 전주시의 대중교통 버스 노선 개편을 위한 시민위원회도 그 사례 가운데 하나다. 시장이 바뀌면서 지속되지 못한 아쉬움은 있지만, 대중교통 노선이라는 복잡한 문제를 시민들이 함께 논의하고 직접 변화시켜 본 것은 매우 값진 경험이었다.


시민 참여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아이디어의 ‘수량’이 아니다. 어떤 아이디어가 사람들의 깊은 공감을 얻으면 그것은 실제 제도화되고 정책으로 완성되는 과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민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이야기할 수 있는 장을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시민 참여에서 거버넌스로


지난 20년 동안 사회혁신은 다양한 분야로 영역을 넓혀왔다. 시민 참여가 ‘거버넌스’의 형태로 구현된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가 완주 로컬푸드 시스템이다. 현재 완주에서는 아침에 농가가 출하한 신선한 과일과 채소가 오후가 되면 모두 판매될 정도로 로컬푸드 시스템이 활발하게 작동하고 있다. 민관 협력으로 구축된 완주의 로컬푸드 시스템은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으며 희망제작소가 만들어낸 대표적인 성과 중 하나다.


서울시를 중심으로는 intermediate organization, 즉 ‘중간지원조직’이 활성화됐고 이후 전국으로 확산됐다. 전국적으로 마을공동체지원센터만 100개가 넘게 설립되는 등 민과 관 사이에서 매개 역할을 담당하는 중간지원조직이 우리 사회의 보편적인 조직 형태로 자리 잡았다.


특히 2011년 시민운동가 출신의 서울시장이 당선되면서 사회혁신을 둘러싼 환경에도 큰 변화가 나타났다. 행정 내부에서 사회혁신을 직접 실험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으며 정책의 수립과 결정, 집행 과정에 시민이 참여하는 구조가 크게 확대됐다. 이는 한국 사회혁신의 과정에서 중요한 경험이었다.


서울시의 ‘정책박람회’는 중앙정부로까지 확산됐고, ‘원전 하나 줄이기’, ‘참여예산제 확대’, ‘중간지원조직 확산’, ‘찾아가는 동주민센터(찾동)’ 등의 사업도 추진됐다. 찾아가는 동주민센터는 동사무소의 일하는 방식을 변화시키고 말단 행정조직의 변화를 유도하는 핵심적인 기제가 됐다. 이러한 흐름은 문재인 정부로 이어져 주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읍면동장 주민추천제’와 같은 제도로 발전했다.


서울시 사회투자기금도 중요한 사회혁신의 시도 가운데 하나였다. 박근혜 정부 시절 정책적 제약으로 충분히 활성화되지 못한 아쉬움이 있지만, 사회투자기금은 당시 세계적으로도 영국 등 일부 국가에서만 선제적으로 시도되던 혁신적인 금융 모델이었다. 현재는 20여 개국에서 유사한 목적의 사회적 금융을 운용하고 있다. 과정에서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서울시 사회투자기금은 “금융을 통해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현실에서 실험했다는 의미가 있다. 도시재생 역시 시민들이 도시 공간을 구성하는 과정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기회와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변화였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서울시에서 축적된 사회혁신의 경험을 국정 과제로 이식하기 위해 청와대에 ‘사회혁신수석비서관’을 신설했다. 1년 남짓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청와대 차원에서 다양한 실험과 시도가 진행됐다. 당시 구축된 유산들이 지속적으로 이어지면서 이번 이재명 정부에서도 한층 발전된 형태의 정책적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다.


이처럼 사회혁신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다양한 시도는 일관되게 그 폭과 깊이를 넓혀왔다. 지난 2000년대 이후 10여 년은 한국 사회혁신의 스펙트럼과 깊이를 확대하고 발전시킨 ‘확장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사회혁신의 확장과 한계

그러나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어느 시점부터 사회혁신이 일종의 ‘정체기’에 접어들었다는 고민도 나타났다. 윤석열 정부 시기 사회혁신 관련 예산과 기구가 축소되거나 배제된 외부적 요인이 있었지만, 사회혁신 내부의 문제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동안 만들어진 수많은 성공 사례들이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시스템이나 구조의 변화로 전환되기보다는 ‘좋은 개별 사례’ 또는 모범 사례의 수준에 머물렀다는 한계가 있었다. 생태계 안에서 다양한 노력이 이루어졌지만 그것이 사회 전체의 구조적 변화를 만들어내는 동력으로까지 상승하지는 못했다.


이러한 상태가 수년간 이어지면서 또 다른 문제도 드러났다. 서울시와 중앙정부의 행정 자원과 결합해 사회혁신을 확산시킨 경험이 많았던 만큼 혁신의 주체들이 독자적이고 독립적인 자립 기반을 충분히 다지지 못했다. 행정의 지원과 함께 성장하면서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이 중단됐을 때 생태계 전체가 급격하게 위축되는 취약성을 경험했다.


개념과 담론은 풍부했지만 현장의 자립적 토대는 상대적으로 취약했다. 기존의 시도들이 정치 권력의 구조를 직접적으로 변화시키는 데까지 이르지 못하면서 정권의 변화와 관계없이 자신의 영역을 지키고 지속가능한 토대를 구축할 수 있는 독립적인 구조를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한계도 남았다.

 


다시 사회혁신이 필요한 이유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사회혁신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 이유는 지금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의 성격 자체가 과거의 전통적인 방식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새롭게 등장하는 사회문제는 기존의 관성과 솔루션만으로 해결하기 어렵다. 이러한 문제를 ‘사회적 난제(Wicked Problems)’라고 부른다. 현재의 제도와 계획만으로 다가오는 거대한 문명사적 변화에 대응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인구구조의 급변과 가구 형태의 변화, 기술 발전과 노동 방식의 전환, 기후위기, AI의 등장 등이 가져오는 복합적 난제들은 종전의 접근법만으로 해결하기 어렵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발전 전략과 패러다임이 필요한 이유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과정이 ‘사회혁신 1.0’의 시대였다면 이제는 새로운 목표와 성취를 설정해야 하는 전환점에 와 있다. 지하철 손잡이로 상징됐던 사회혁신의 출발이 ‘일상의 혁신’이었다면, 이제 사회혁신이 새롭게 던져야 할 도전은 ‘일상의 혁신에서 구조의 혁신으로 전환’이다.


 

일상의 혁신에서 구조의 혁신으로


구조의 혁신을 위해 중요하게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이 ‘지역(Local)’이다. 지역은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일상의 공간인 동시에 사회 시스템이 실제로 작동하는 현장이다. 인구, 돌봄, 일자리, 경제, 기후 등 다양한 사회적 난제가 집약되어 나타나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지역은 구조적 혁신을 직접 실험하고 도전해 볼 수 있는 중요한 공간이다.


사회혁신을 둘러싼 제도적 조건에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사회연대경제기본법’의 제정 논의, 행정안전부 ‘사회연대경제국’ 설치, ‘지방자치법’ 개정 등 새로운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법적·제도적 토대가 마련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사회혁신이 자원을 동원하고 한 차원 높은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법 제정과 사회적 연대 체계의 구축은 과거의 사회혁신과는 다른 새로운 단계로 진화할 수 있는 기반이 될 수 있다. 구조적 혁신에 도전할 수 있는 새로운 조건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사회혁신은 단순히 통계 수치를 변화시키는 일이 아니라 ‘관계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기존 문제에 수동적으로 대응하는 것을 넘어 새로운 대안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고, 이를 제도의 영역으로 견인하고 확산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러한 변화된 조건들을 아래와 같이 네 가지 방법으로 세분화하여 대응할 필요가 있다. 먼저, 사회혁신의 지속을 담보하기 위한 생태계 구축이다. 새로운 세대들이 사회혁신 활동에 진입할 수 있는 인프라 구축, 인적자원에 대한 지원과 활동공간의 생성이 포함될 수 있다. 둘째, 사회혁신의 물적 토대의 마련, 그 중에서도 특히 시민자산화 모델의 구축이 중요하다. 셋째, 사회혁신의 결과를 온전하게 평가하고 측정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사회혁신 생태계의 더욱 넓은 연대와 확산이다.


 

지난 20년 동안 한국 사회에는 다양한 사회혁신의 경험과 자산이 축적됐다. 일상에서 출발한 작은 변화는 시민의 참여로 확장됐고, 거버넌스와 행정의 변화, 사회적 금융과 도시재생 등 다양한 영역으로 이어졌다. 이제는 지난 20년 동안 축적된 사회혁신의 자산을 바탕으로 목표와 과제를 더욱 도전적으로 설정해야 할 시점이다.

희망제작소


주소 03978 서울시 마포구 월드컵북로 92, 4층

대표 윤석인  |  사업자번호 101-82-14123

Tel. 02-3210-0909  |  Fax. 02-3210-0126

E-mail. hope@makehope.org  | 후원 KEB하나은행 271-910002-36004 (재)희망제작소

© makehope. All Rights Reserved.




희망제작소

주소 03978 서울시 마포구 월드컵북로 92

대표 윤석인  사업자번호 101-82-14123

전화 02-3210-0909  팩스 02-3210-0126

이메일 hope@makehope.org

© 2024 Makehope. SITE BY 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