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전문] 21세기를 횡단하기 | 김홍중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2026-08-03

희망제작소와 카카오가 함께 준비한 <대한민국 사회혁신 컨퍼런스 2026(SIC 2026)>이 지난 7월 14일 서울 중구 페럼타워에서 성황리에 마무리되었습니다. 이번 컨퍼런스는 희망제작소의 창립 2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한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사회혁신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다가올 미래를 함께 그린 기조강연 전문을 소개합니다. 



21세기를 횡단하기

김홍중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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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조강연을 맡은 김홍중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들어가며

 

사회를 조직이나 제도가 아닌 집합적 심리 에너지의 관점에서 파악할 때, 20세기 한국사회를 특징짓는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그 생존주의적 욕망의 강렬함이다. 2024년에 출판된 저서 『서바이벌리스트 모더니티』에서 나는 20세기 한국사회가 어떻게 ‘생존’이라는 가치와 이념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지금에 이르렀는지를 다양한 사례들을 가지고 논의한 바 있다(김홍중, 2024).


19세기 후반의 국망, 20세기 중반의 한국전쟁, 그리고 1997년 IMF 외환위기라는 세 차례의 위기를 거치면서 한국사회는 살아남는 것(survival)에 강력하고 실질적인 가치를 부여했다. 생존은 하나의 규범이 되어, 국가/민족에서 조직/공동체를 거쳐 가족/개인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의 생각과 행동을 움직여 온 핵심 동력으로 기능한다. 내가 생존주의라 부르는 집합적 심리-레짐은 이처럼 장기간에 걸쳐 형성되어 한국사회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가치체계를 가리킨다.


나는 특히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더욱 강화된 신자유주의적 생존주의를 비판해 왔는데, 그것은 경쟁에서의 승리, 능력주의에 대한 승인, 공정한 게임의 규칙에 대한 요구가 우리 사회의 연대와 공존의 도덕적 근거를 훼손하고 있다는 판단에서였다(김홍중, 2016).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지난 20년간의 사회혁신의 역사는 한국사회에서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사회혁신이 표방한 가치는 한국사회에 깊이 스며들어 사회 구성원들의 문화와 심성을 움직여 온 생존의 논리를 넘어, 공존과 연대의 미래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혁신의 지난 20년을 돌아보고 그 미래를 성찰하는 일은, 이런 점에서, 우리가 어떤 사회를 살아왔고 앞으로 어떤 사회를 만들어가야 하는가를 함께 묻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상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나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주제를 논의해 보고자 한다. 첫째, 21세기의 첫 사분의 일을 이루는 지난 20년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우리 시대의 핵심 문제가 무엇인가? 둘째, 이러한 새로운 시대로의 진입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시대횡단’이란 무엇인가? 시대를 횡단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것에 적응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 것인가? 셋째, 이런 파국적 현실 속에서 희망이란 무엇인가?

 

21세기를 이해하기

 

우리 사회에서 다양한 사회혁신 조직들이 활동해 온 지난 20년은 20세기의 종언과 그 이후의 혼돈으로 이행하는 전환기였다. 2001년의 9·11 테러,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 2011년의 후쿠시마 원전 사고, 그리고 2020년의 코로나 팬데믹은 21세기를 규정하는 대표적인 사건들이다. 이러한 국제적 변화 속에서 한국사회 역시 매우 역동적인 전환의 시간을 통과해 왔다. 그 변화의 중심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핵심 문제가 존재한다. 첫째, 사회적인 것의 분열. 둘째, 알고리즘과 AI의 부상. 셋째, 인류세의 도래와 생태 파국.


첫째, 사회적인 것의 분열이다. 사회라는 용어는 사실 사회학적으로 볼 때 가장 모호하고 폭넓은 개념 중의 하나다. 흔히 국민-국가를 사회라 부르기도 하고, 국가나 시장과 구별되는 시민사회를 사회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그 의미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회라는 말이 사용되는 경우, 매우 독특한 규범적/도덕적 함의가 거기에 부여된다. 즉, 사회는 인간 상호 간의 연대와 호혜성, 시민성, 부조와 돌봄의 가치를 강하게 함축한다.


그런데 지난 20년 동안 우리는 이러한 의미의 사회와 시민성이 분열되는 과정을 목격해 왔다. 한국사회는 계급, 젠더, 세대, 이념이라는 여러 축을 따라 깊게 쪼개졌다. 계급 불평등에 더해서 최근 들어 더욱 예리하게 부각된 것은 젠더, 세대, 이념을 둘러싼 갈등이다.


가령, 2016년 이후의 페미니즘 리부트와 미투 운동 이후 젠더는 한국사회의 핵심 쟁점으로 부상했다(손희정, 2017). 또한 『88만원 세대』(2007년)가 제기했던 청년세대의 불안과 좌절은 이후 세대 정치의 중요한 동력이 되었고, 조국 사태(2019년)와 윤석열 정부의 등장을 거치면서 새로운 형태로 진화한다(천관율·정한울, 2020). 더 나아가 이념적으로, 우리는 행동하는 극우의 등장, 한국 극우 제3의 물결을 목도하고 있다(신진욱·이재정·양승훈·이승윤, 2025). 이러한 갈등들은 우리가 당연하게 전제해 왔던 ‘사회’라는 공간 자체를 동요시킨다. 사회혁신은 이 문제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우리 시대의 두 번째 특징은 알고리즘과 AI의 부상이다. 지금 우리의 일상적 소통, 정보, 소비 등을 규정하는 기술적 장치들의 등장은, 한국 사회혁신의 지난 20년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예를 들어, 위키피디아(2001)와 페이스북(2004), 유튜브(2005), 트위터(2006), 인스타그램(2010), 스냅챗(2011), OpenAI(2015), 틱톡(2016) 등의 등장은 우리의 소통과 생활 방식을 크게 바꾸었다. 2016년에 있었던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은 AI 시대의 도래를 상징적으로 알렸고, 2022년 ChatGPT의 공개와 함께 생성형 AI는 일상 속으로 빠르게 침투하여 사회를 크게 변동시키고 있다.


기술은 사회의 구성, 사람들의 생각과 존재의 방식 자체를 변화시킨다. 과거 신문과 잡지, 방송이 담당하던 공론장은 플랫폼과 알고리즘에 의해 대체되었다. 정보의 생산과 유통, 여론의 형성과 확산, 심지어 인간관계의 조직 방식에도 알고리즘이 개입하고, 이제 정책이나 중요한 판단에까지 침투하고 있다. SNS는 유사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도록 만들며, 공론장의 숙의 기능은 현저히 약화되었다. 사회는 상호 비난과 혐오, 공격과 방어가 반복되는 진영들의 투쟁 공간으로 변해가고 있다(바이디야나단, 2020).


또한, 알고리즘 통치성과 AI의 확산은 일상 자체를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에 편입시켰다. 클릭이나 검색이 플랫폼 기업이 만드는 예측 상품의 공짜 원재료가 되고 있다(주보프, 2021). 사회 자체가 공장으로 변화했다(이항우, 2017: 126). AI는 노동뿐 아니라 인간 지성이나 창작의 영역에도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 글쓰기, 독서, 학습, 기억과 판단의 방식 자체 역시 변화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기술 혁신이 아니라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던지게 하는 문명사적 사건이다. 이를 고려할 때, 우리는 사회혁신이 말하는 사회를 디지털 공간, 온라인, AI의 연결망까지 확장시켜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마지막으로, 인류세(Anthropocene)의 도래다. 인류세란 2000년에 폴 크뤼첸과 유진 스토머가 제안한 개념이다(Crutzen and Stoermer, 2000). 약 1만 1천7백 년 동안 지속되어 온 홀로세(Holocene)가 끝나고, 인간 활동이 지구 시스템 전체를 변화시키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충격적인 메시지가 저 용어에 담겨 있다. 인류세가 우리에게 던지는 충격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김홍중, 2025a: 317-321).


첫째, 우리는 더 이상 역사를 진보와 발전으로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인류세는 인간이 지구에 가한 영향이 다시 인간에게 되돌아오는 파국적 운동으로 특징지어진다. 기후 파국은 미래가 아니라 현실이 된 것이다. 폭염과 홍수, 산불과 가뭄은 일상이며, 그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능력 역시 불평등하게 분배되고 있다. 따라서 기후위기는 생태 문제인 동시에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이기도 하다.


둘째, 인류세는 우리가 사회를 바라보는 방식 자체를 바꾸도록 요구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사회를 인간들의 집합으로 이해해 왔다. 그러나 생태 위기는 인간이 수많은 비인간 존재들과의 상호의존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숲과 강, 동물과 식물, 바이러스와 기후는 인간과 함께 세계를 구성하는 행위자들이며, 정치적으로 표현하자면 아직 시민권을 얻지 못한 시민들일 수도 있다. 이는 우리에게 다시 한번 21세기의 사회가 무엇이며, 사회혁신의 범위가 인간을 넘어설 수 있는지, 그리고 비인간 존재들 역시 그 협력자가 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이를 종합해 보면, 21세기의 사회는 갈등과 대립의 축을 따라 분열되고 있다(이러한 현상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 곳곳에서 홉스적 의미의 ‘전쟁 상태’가 출현하고 있다). 알고리즘과 AI의 등장 속에서 인간적 소통과 공론장의 공간은 축소되는 한편, 생태적으로 사회의 범위는 비인간 존재들까지 포함하는 방향으로 확장되고 있다. 이것은 더 이상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사회가 아니다. 사회혁신은 지금 사회가 갈라지고, 사라지는 동시에, 생태적으로 확장되어 가는 근본적 변화와 마주하고 있다.

 

시대횡단자

 

이러한 혼돈의 상황을 탐구하면서 나는 최근 ‘시대횡단(epoch-traversing)’이라는 개념을 제안했다(김홍중, 2025b). 시대횡단이란 한 시대와 다른 시대 사이에 놓인 불확실한 경계를 건너는 사회적, 문화적, 윤리적, 정치적 실천을 가리킨다. 그것은 이미 주어진 길을 따라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존재하지 않는 길을 만들어 가는 일에 가깝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두 가지 시대횡단의 과제가 동시에 주어져 있다. 하나는 20세기에서 21세기로 건너가는 일이다. 21세기는 20세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시대로 전개되고 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여전히 20세기의 언어와 가치, 그리고 상상력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첫 번째의 시대횡단은 지금 이 시대의 리얼리티에 대한 인식으로 사람들을 이끄는 것, 즉 21세기로의 시대횡단이다. 두 번째의 시대횡단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로부터 그 이후로 건너가는 것, 미래로의 길을 내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의 시대횡단을 수행하는 주체를 나는 ‘시대횡단자(epoch-traverser)’라 부른다.


21세기의 현실이 파국적 양상으로 펼쳐지고 있기 때문에, 시대횡단자는 불가피하게 파국주의자의 면모를 띤다. 여기서 파국주의(catastrophism)란 우리 시대를 진보와 발전의 서사가 아니라, 급진적이고 파괴적인 변화라는 관점에서 읽어내는 감수성을 의미한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21세기를 번영과 혁신의 시대로 꿈꾸고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생태 위기와 AI에 의한 문명적 변동, 그리고 사회적 분열의 심화를 생각해 본다면, 21세기는 오히려 임마누엘 월러스틴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알던 세계의 종언”에 훨씬 더 가깝다(월러스틴, 2001). 시대횡단의 출발점은 그 종언에 놀라는 것, 즉 각성이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시대의 위기에 놀라지 못한다면, 21세기로의 횡단도, 그리고 그 이후를 향한 횡단도 불가능하다.


더 나아가서, 21세기로의 시대횡단은 많은 경우 우울과 좌절을 동반할 수도 있다. 특히 진보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사회운동과 사회혁신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현상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자본과 권력의 힘은 더욱 강해지는 듯 보이고, 사회적 운동성은 약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때로는 깊은 무력감이 엄습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파국주의적 감정들이 결코 무용하거나 부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행위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시대횡단은 파국적 현재로부터 그 이후를 향해 나아가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매우 흥미로운 텍스트다(한강, 2007). 이 소설의 주인공 영혜는 어느 날 우연히 꿈에서 죽은 고기를 탐식하는 자신의 얼굴을 본 이후 급작스럽게 육식을 거부하기 시작한다. 고기를 끊음과 동시에 영혜는 가부장적 질서에 저항하면서, 사회적 규범과 충돌하다가, 결국 정신 병원에 수용되어 음식을 완전히 끊고 죽음에 가까워져 간다. 한강은 영혜를 통해 인간 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현대 문명의 외부를 향해 나아가는 낯선 주체의 형상을 제시한다. 영혜는 사회적 운동가도 활동가도 아닌 평범한 여성이다. 정치적 의식이 두드러지지도 않고, 선언문을 쓰지도 않으며, 조직을 만들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영혜가 보여주는 저항은 근본적이고 격렬하다. 영혜는 우리 시대의 상식과 규범적 정상성을 넘어서는 미래적 가치의 단초를 보여준다.


물론 영혜가 보여준 삶은 사회혁신의 현실적 모델과는 거리가 있으며, 윤리적으로 모방해야 할 삶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영혜는 ‘문학적’ 형상이다. 그러나, 문학의 힘은 현실에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어떤 가능성을 먼저 보여주는 데 있다. 이 점에 주목할 때, 우리는 영혜라는 인물이 체현하는 ‘가치’가 사실 지난 20년간 한국사회에서 서서히 형성되어 온 사회적 가치와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영혜보다 한 세대 젊은 MZ 여성들의 감수성은 또래의 남성들과 다른 모습을 보인다. 그들은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온라인 공간에서 혐오 담론과 싸우고, 각종 전시회나 문화공간을 채우고, 책을 읽는 존재로 성장했고, (남태령이 상징하듯) 계엄 정국에서 중요한 정치적 집합 행위를 보여준 바 있다.


주디스 버틀러를 빌려 말하자면, 이들은 ‘취약성(vulnerability)’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성을 구현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들은 부(富)나 기회의 공평한 분배를 넘어, 생명의 위태로움이 불평등하게 배분되지 않고 누구나 “살 만한 삶(livable life)”을 누리며 어떤 생명의 죽음도 “애도가능성(grievability)”에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근본적인 정치적 요구를 드러낸다(버틀러, 2018; 버틀러, 2021; 버틀러·보름스, 2024). 우리가 지난 10년 동안 한국사회의 여러 장소들에서 목격한 여성-동물-장애 연대는 이를 보여주는 한 징후다.


아직 강력한 사회적 힘으로 성장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사회의 곳곳에 새로운 연대와 횡단의 시도들이 나타나고 있다. 말하자면, 영혜라는 허구적 인물이 보여주는 문제의식은 실제 한국사회의 적지 않은 젊은 여성들의 삶 속에서 공감을 얻어 나름의 방식으로 구현되고 있다. 많은 이들이 공장식 축산과 육식을 거부하고, 어떤 이들은 기후위기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비판적 인식 속에서 비출산을 선택하고 있다. 이러한 실천들은 현존하는 삶의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라는 점에서 커다란 정치적 잠재성을 갖고 있다.


아직까지 한국사회는 이런 움직임에 대해서 그다지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지 않는 듯이 보인다. 인간의 고통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왜 동물의 문제를 이야기하느냐는 비판이 제기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자발적 사회혁신의 실천들 속에서 21세기 너머로 건너가려는 시대횡단의 충동이 엿보인다. 특히 페미니즘이 동물권, 기후위기, 장애와 돌봄의 문제 등과 연결되면서 형성하는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은 주목할 만하다. 그것은 서구 근대의 남성 주체를 모델로 삼은 자율적이고 자립적인 인간이라는 허구적 신화를 비판하고 해체하며, 상호의존적이고 서로 돌보는 관계적 윤리를 근본적으로 옹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횡단의 여러 징후들은 앞으로 펼쳐질 사회혁신의 진화에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 우리에게 주어진 화두는 바로 이것이다. 사회가 분열되고, 인간이라는 존재가 문명적으로 새로운 재구성에 노출되며, 생태 위기가 지구적 생명 존재들을 위협하고, 그 과정에서 복합적인 모순과 고통이 약자들에게 특히 집중되는 이 시대를 우리는 어떻게 뚫고 나가야 하는가? 우리가 던져야 하는 근본적인 질문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싶다.

 

희망을 제작한다는 것

 

마지막으로 나는 한국의 중요한 사회혁신 운동 주체 중 하나인 ‘희망제작소’가 표방하는 ‘희망’이라는 개념에 대한 성찰을 개진하면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우리는 미래에 대한 감정을 표시하는 여러 용어들을 알고 있다. 욕망, 소망, 희망 등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 희망은 사실 매우 독특한 의미론을 갖고 있다. 거기에는 어떤 역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희망은 희망할 이유가 충분할 때 생겨나는 감정이 아니다. 오히려 희망할 근거가 사라졌을 때 나타나는 감정에 더 가깝다. 로마서 4장 18절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을 가리켜 “희망에 거슬러 희망했다(hope against hope)”고 말한다. 나는 이 표현이 희망의 본질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합리적으로 판단하면 희망할 근거가 없는 상황, 미래가 닫혀 버린 것처럼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어떤 인간적 힘이 있다면, 그것이 희망이다.


이런 점에서 희망의 반대말은 절망이 아니라 낙관이다. 절망은 희망의 반대가 아니라 그 조건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희망을 발견하는 것은 미래를 긍정할 때가 아니라 절망에 빠져 있을 때다. 희망은 희망의 불가능성을 극복하는 회복탄력성(resilience)을 자신의 구성요소로 갖는다(Crapanzano, 2003: 15). 이런 점에서 희망은 절망으로부터, 절망을 뚫고 솟아나는 것이다. 래시가 말하는 “낙관주의 없는 희망”(Lasch, 1991: 390-3)은 바로 이를 가리킨다.


희망은 현실의 고통과 문제를 보는 사람의 감정이다. 거기에서 비판이 나오고, 항의가 나오며, 변화에 대한 요구가 나온다. 반대로 낙관은 종종 현재의 질서를 정당화하는 사람들의 감정이다. 낙관주의는 현재의 질서를 유지한 채, 이해관계를 그대로 유지한 채, 미래로 나아가려는 태도인 것이다. 발전과 번영에 대한 낙관은 희망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든다.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희망할 필요가 없다. 희망은 오히려 현실이 잘못되어 있다는 감각 속에서 태어난다.


이런 의미에서, 희망제작소의 정체성을 이루는 여러 요소에 하나를 더해보는 것은 어떨까? 잘 알려진 것처럼 희망제작소는 스스로를 ‘Think and Do Tank’라고 부른다. 여기에 ‘Feel Tank’라는 이름을 덧붙여 보자는 이야기다.


‘필 탱크(Feel Tank)’는 2000년대 초반 로런 벌랜트와 앤 츠베트코비치 등을 중심으로 형성된 연구자, 예술가, 사회운동가들의 느슨한 네트워크의 이름이다. 시카고와 뉴욕 등에서 활동하면서, 이들은 사회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고(think)와 실천(do)만이 아니라 감정(feel)의 차원을 함께 사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정치적 우울이나 냉소와 같은 감정을 공적인 차원에서 논의하고 사회적 의제로 전환시키고자 했다. 그래서 ‘필 탱크’는 동시에 ‘퍼블릭 필링스(Public Feelings)’ 프로젝트라고 불리기도 했다(츠베트코비치, 2025).


이 통찰은 오늘의 사회혁신, 그리고 희망의 제작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희망제작소는 우리 시대의 불안과 분노, 상실감과 무력감 같은 사회적 감정들로부터 출발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사고로 전환하고, 다시 실천으로 연결하며, 마침내 희망이라는 정동으로 조직하는 공간이 될 수 있다. 희망제작소는 Think Tank이자 Do Tank이며, 동시에 Feel Tank여야 한다. 그것은 또한 사회혁신의 모토일 수도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분열의 시대이며, 불확실성의 시대이고, 파국의 시대다.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면서, 바로 거기에서 우리가 느끼는 이 시대에 대한 감각과 감정에서 시작해야 한다. 어쩌면, 바로 그때 다음 시대로 향하는 시대횡단과 사회혁신의 가능성이 가시화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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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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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utzen P. J. and Stoermer, E. F. 2000. “The ‘Anthropocene’”, The International Geosphere-Biosphere Programme (IGBP) Newsletter 41.

Lasch, Christopher. 1991. The True and Only Heaven. New York & London. W. W. Norton & Comp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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