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이 말하는 ‘내 일상의 민주주의’
계엄령 사태와 조기 대선을 겪으며, 시민들은 어떤 민주주의를 상상하고 있을까요?
법과 제도를 넘어, 우리는 ‘일상 속 민주주의’를 얼마나 체감하고 있을까요.
희망제작소가 지난 6월 실시한 <시민의 일상 속 민주주의 인식조사> 설문조사 참여자 중
인터뷰에 응해주신 시민 3인(30대·40대·50대/익명)의 목소리를 전합니다.
이들의 삶과 시선 속에 깃든 민주주의 이야기를 지금 만나보세요.
(* 해당 인터뷰는 지난 6월 27일 희망제작소에서 익명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서로 달라도 말할 수 있는 민주주의

Q. 계엄령 사태 이후, 일상과 감정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현재 비영리 단체에서 일하고 있는데요. 당시 제 주변에 거리로 나간 동료들이 많았습니다. 한겨울 내내 차가운 길 위에서 시간을 보낸 이들도 있었고요. 그런데 저는 그 시기, 결혼을 앞두고 있었거든요. 혼란의 정점에 새로운 인생의 출발선에 서 있다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하게 느껴졌어요. 결혼식이 제주도에서 예정돼 있었는데, 계엄이라는 비상 상황 속에서 “비행기는 뜨겠냐”, “사람들은 올 수 있겠냐”는 이야기도 들었죠.
그 순간엔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어요. 동료들은 추운 거리에 있고, 저는 집회에 가겠다고 하니 부모님이 말리시고… 감정이 많이 복잡했어요.
Q. 계엄령 선포하던 그날을 기억하시나요?
네, 저희 부부가 혼인신고를 먼저 하고 결혼식을 앞둔 상태로 함께 살고 있었어요. 그날 저녁, 남편과 침대에 누워 미드를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카카오톡 알림이 쉴 새 없이 울리기 시작했죠. 뭔가 이상하다 싶어 뉴스를 켜 보니, 나라 전체가 뒤흔들리고 있었어요.
그때부터 새벽까지 유튜브 라이브로 국회 상황을 지켜봤어요. “이게 정말 현실인가” 싶었고, 불안해서 상황이 정리되는 걸 끝까지 보고 나서야 겨우 잠이 들었어요.
가까운 사람들과의 충돌, 그 안의 균열과 가능성
Q. 계엄령 사태 이후 갈등을 경험한 적이 있나요?
제가 일하는 단체는 규모가 작고, 대표님은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분이에요. 시민사회 활동을 하는 단체인데도, 대표님은 윤석열 정부를 노골적으로 지지하셨어요. 지난해 12월 이후에도 그 입장은 계속됐고요.
그런 모습을 보며 ‘내가 이 조직에 몸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누군가는 다르게 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주변에서는 대표님을 향해 “직접적으로 말하지 말라”는 조언도 있었지만, 대표님은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으셨고 저 역시 굳이 말을 섞지 않거나 입을 닫는 쪽을 택했죠. 대표님이 계신 자리에서는 정치 이야기를 일절 하지 않았어요. 대신 동료들과는 자유롭게 의견을 나눴습니다. 아무래도 직급에 따라 말의 수위를 조절하게 되더라고요.
Q. 다른 공간에서도 의견 표현이 어려웠던 경험이 있었나요?
결혼하면서 여러 이슈가 생겼어요. 친정 부모님은 과거 학생운동 세대였고, 시댁은 극우 성향이 짙은 편이에요. 결혼하지 않았다면 마주칠 일 없는 세계였죠.
흥미로운 건, 친정과 시댁 모두 뉴스를 보며 화를 내긴 하는데, 그 ‘화나는 포인트’가 완전히 달라요. 하나의 사실을 두고 해석하는 방식이 정말 다르다는 게 경이로웠어요. 시댁 어른들은 유튜브에서 퍼지는 가짜뉴스를 굉장히 진지하게 받아들이시고, 하루 대부분을 그런 정보로 채우세요.
그런 분들을 마주할 땐 마치 인류학자가 된 기분이 들어요. 이건 ‘설득’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믿음 체계’를 접하는 경험 같아요. 극우의 논리를 진심으로 믿는 분들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이었죠.
Q. 남편과도 다른 의견으로 갈등이 있었나요?
남편은 저와 동갑이고, 평소엔 본인을 중도나 좌파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상대적으로 보면 저보다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죠. 그래서 평소엔 정치 이야기를 피했는데, 대선이 다가오자 어쩔 수 없이 이야기할 일이 생기더라고요.
대선 당일, 남편은 4번 후보를 지지했고 저는 1번을 지지했는데, 저녁에 저를 향해 “1번 찍은 사람은 사람도 아니다”, “다 빨갱이다”라고 말하더라고요. 순간 너무 화가 나서 “장인·장모님께 전화해서 당신이 이런 얘기했다고 해볼까?” 하고 맞받아쳤고, 결국 싸움이 커졌어요. “나는 나가련다” 하고 문을 쾅 닫고 나가며 그 싸움은 끝났죠.

말할 수 있는 자리, 민주주의의 최소 조건
Q. 정치적 차이를 다르게 보는 시선이 생기셨다고요.
예전에는 ‘극우’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어요. 세대가 바뀌면 자연스럽게 변화할 거라 생각했고, 젊은 사람들은 다른 생각을 하겠지 싶었죠. 그런데 남편과 제가 동갑임에도 생각이 이렇게 다를 수 있고, 남편의 친구 중에는 녹색당 출마 경력이 있는 사람도 있었어요. 보수적인 지역 출신이라고 해서 다 보수적인 것도 아니고, 그 안에도 다양한 커뮤니티가 존재하더라고요. 복잡한 구도 속에 내가 놓여 있다는 걸, 이번 일을 통해 비로소 체감하게 됐어요.
Q. 그런 차이 안에서 희망적인 변화도 보셨나요?
제 주변에 경북 경주 출신 여성과 호남 출신 남성인 부부가 있는데요. 서로 한 방향만 보며 성장한 셈인데 결혼 후 배우자와 살면서 조금씩 균열이 생겼다고 하더라고요. 처음엔 반발심이 컸지만, 이야기를 나누며 서서히 바뀌게 된 거죠.
저와 남편도 의견은 다르지만, 정치적인 의견 말고도 한 사람으로서 서로에게 없는 부분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관계가 유지된다고 생각해요. 남편에게는 제게는 없는 '단호함'이 있고 이게 결혼으로 이어졌다고 보거든요. 어찌보면 누구나 조금씩 균열을 만들어가고, 서로 다른 존재를 알게 되는 것 같아요. 이 모든 게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요소라고 느껴요.
Q. 민주주의의 미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우리가 아직까지도 민주주의보다 나은 제도를 찾지 못했잖아요. 최선이 아닐 수도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가장 나은 체제인 셈이죠. 문제는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사람들’이에요. 자기 몫을 절대 내려놓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는 한, 문제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봐요. 모두에게 이로울 수 있는 길을 설득해 가는 과정, 그게 정치고 민주주의겠죠.
그리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말할 수 있는 자리가 있었는가’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의견을 표현할 기회가 없다면,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잖아요. 우리는 자주 ‘어차피 이런 얘기 못 해’라고 짐작하고 상대의 입을 막아버리곤 하죠. 저는 그 짐작에서 시작되는 무시와 침묵, 배제에 특히 민감해요.
Q.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세월호, 이태원 참사 같은 큰 사건이 있을 때마다 ‘내가 그 자리에 없었다’는 점이 늘 마음에 걸렸어요. 여러 사정이 있었겠지만, 죄책감이 남더라고요. 이번엔 민주주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왔고, 그 자체만으로도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보자고 생각했어요. 말하는 일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시작이라고 믿으니까요.
설문조사 결과보기
시민 3명의 인터뷰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민주주의는 제도보다 일상 속 태도와 관계에서 실현된다는 점입니다. 거리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시민들이 느끼는 갈등과 균열은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생생한 현장이기도 합니다. 의견이 다르더라도 서로 말할 수 있는 환경, 다름을 견디는 경험이 민주주의의 토대가 된다는 인식도 이어집니다.
이러한 과정은 불편하고 때론 아프지만, 결국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위한 과정처럼 보입니다. 정치는 거창한 말이 아니라, 내가 말할 수 있는 자리를 상대방에게도 열어주고 지켜내는 노력에서 시작됩니다. 민주주의는 우리 삶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인터뷰 진행: 방연주 시민연결팀 연구위원, 이규리 시민연결팀 선임연구원
인터뷰 정리: 방연주 시민연결팀 연구위원
시민이 말하는 ‘내 일상의 민주주의’
계엄령 사태와 조기 대선을 겪으며, 시민들은 어떤 민주주의를 상상하고 있을까요?
법과 제도를 넘어, 우리는 ‘일상 속 민주주의’를 얼마나 체감하고 있을까요.
희망제작소가 지난 6월 실시한 <시민의 일상 속 민주주의 인식조사> 설문조사 참여자 중
인터뷰에 응해주신 시민 3인(30대·40대·50대/익명)의 목소리를 전합니다.
이들의 삶과 시선 속에 깃든 민주주의 이야기를 지금 만나보세요.
(* 해당 인터뷰는 지난 6월 27일 희망제작소에서 익명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서로 달라도 말할 수 있는 민주주의
Q. 계엄령 사태 이후, 일상과 감정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현재 비영리 단체에서 일하고 있는데요. 당시 제 주변에 거리로 나간 동료들이 많았습니다. 한겨울 내내 차가운 길 위에서 시간을 보낸 이들도 있었고요. 그런데 저는 그 시기, 결혼을 앞두고 있었거든요. 혼란의 정점에 새로운 인생의 출발선에 서 있다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하게 느껴졌어요. 결혼식이 제주도에서 예정돼 있었는데, 계엄이라는 비상 상황 속에서 “비행기는 뜨겠냐”, “사람들은 올 수 있겠냐”는 이야기도 들었죠.
그 순간엔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어요. 동료들은 추운 거리에 있고, 저는 집회에 가겠다고 하니 부모님이 말리시고… 감정이 많이 복잡했어요.
Q. 계엄령 선포하던 그날을 기억하시나요?
네, 저희 부부가 혼인신고를 먼저 하고 결혼식을 앞둔 상태로 함께 살고 있었어요. 그날 저녁, 남편과 침대에 누워 미드를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카카오톡 알림이 쉴 새 없이 울리기 시작했죠. 뭔가 이상하다 싶어 뉴스를 켜 보니, 나라 전체가 뒤흔들리고 있었어요.
그때부터 새벽까지 유튜브 라이브로 국회 상황을 지켜봤어요. “이게 정말 현실인가” 싶었고, 불안해서 상황이 정리되는 걸 끝까지 보고 나서야 겨우 잠이 들었어요.
가까운 사람들과의 충돌, 그 안의 균열과 가능성
Q. 계엄령 사태 이후 갈등을 경험한 적이 있나요?
제가 일하는 단체는 규모가 작고, 대표님은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분이에요. 시민사회 활동을 하는 단체인데도, 대표님은 윤석열 정부를 노골적으로 지지하셨어요. 지난해 12월 이후에도 그 입장은 계속됐고요.
그런 모습을 보며 ‘내가 이 조직에 몸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누군가는 다르게 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주변에서는 대표님을 향해 “직접적으로 말하지 말라”는 조언도 있었지만, 대표님은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으셨고 저 역시 굳이 말을 섞지 않거나 입을 닫는 쪽을 택했죠. 대표님이 계신 자리에서는 정치 이야기를 일절 하지 않았어요. 대신 동료들과는 자유롭게 의견을 나눴습니다. 아무래도 직급에 따라 말의 수위를 조절하게 되더라고요.
Q. 다른 공간에서도 의견 표현이 어려웠던 경험이 있었나요?
결혼하면서 여러 이슈가 생겼어요. 친정 부모님은 과거 학생운동 세대였고, 시댁은 극우 성향이 짙은 편이에요. 결혼하지 않았다면 마주칠 일 없는 세계였죠.
흥미로운 건, 친정과 시댁 모두 뉴스를 보며 화를 내긴 하는데, 그 ‘화나는 포인트’가 완전히 달라요. 하나의 사실을 두고 해석하는 방식이 정말 다르다는 게 경이로웠어요. 시댁 어른들은 유튜브에서 퍼지는 가짜뉴스를 굉장히 진지하게 받아들이시고, 하루 대부분을 그런 정보로 채우세요.
그런 분들을 마주할 땐 마치 인류학자가 된 기분이 들어요. 이건 ‘설득’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믿음 체계’를 접하는 경험 같아요. 극우의 논리를 진심으로 믿는 분들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이었죠.
Q. 남편과도 다른 의견으로 갈등이 있었나요?
남편은 저와 동갑이고, 평소엔 본인을 중도나 좌파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상대적으로 보면 저보다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죠. 그래서 평소엔 정치 이야기를 피했는데, 대선이 다가오자 어쩔 수 없이 이야기할 일이 생기더라고요.
대선 당일, 남편은 4번 후보를 지지했고 저는 1번을 지지했는데, 저녁에 저를 향해 “1번 찍은 사람은 사람도 아니다”, “다 빨갱이다”라고 말하더라고요. 순간 너무 화가 나서 “장인·장모님께 전화해서 당신이 이런 얘기했다고 해볼까?” 하고 맞받아쳤고, 결국 싸움이 커졌어요. “나는 나가련다” 하고 문을 쾅 닫고 나가며 그 싸움은 끝났죠.
말할 수 있는 자리, 민주주의의 최소 조건
Q. 정치적 차이를 다르게 보는 시선이 생기셨다고요.
예전에는 ‘극우’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어요. 세대가 바뀌면 자연스럽게 변화할 거라 생각했고, 젊은 사람들은 다른 생각을 하겠지 싶었죠. 그런데 남편과 제가 동갑임에도 생각이 이렇게 다를 수 있고, 남편의 친구 중에는 녹색당 출마 경력이 있는 사람도 있었어요. 보수적인 지역 출신이라고 해서 다 보수적인 것도 아니고, 그 안에도 다양한 커뮤니티가 존재하더라고요. 복잡한 구도 속에 내가 놓여 있다는 걸, 이번 일을 통해 비로소 체감하게 됐어요.
Q. 그런 차이 안에서 희망적인 변화도 보셨나요?
제 주변에 경북 경주 출신 여성과 호남 출신 남성인 부부가 있는데요. 서로 한 방향만 보며 성장한 셈인데 결혼 후 배우자와 살면서 조금씩 균열이 생겼다고 하더라고요. 처음엔 반발심이 컸지만, 이야기를 나누며 서서히 바뀌게 된 거죠.
저와 남편도 의견은 다르지만, 정치적인 의견 말고도 한 사람으로서 서로에게 없는 부분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관계가 유지된다고 생각해요. 남편에게는 제게는 없는 '단호함'이 있고 이게 결혼으로 이어졌다고 보거든요. 어찌보면 누구나 조금씩 균열을 만들어가고, 서로 다른 존재를 알게 되는 것 같아요. 이 모든 게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요소라고 느껴요.
Q. 민주주의의 미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우리가 아직까지도 민주주의보다 나은 제도를 찾지 못했잖아요. 최선이 아닐 수도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가장 나은 체제인 셈이죠. 문제는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사람들’이에요. 자기 몫을 절대 내려놓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는 한, 문제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봐요. 모두에게 이로울 수 있는 길을 설득해 가는 과정, 그게 정치고 민주주의겠죠.
그리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말할 수 있는 자리가 있었는가’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의견을 표현할 기회가 없다면,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잖아요. 우리는 자주 ‘어차피 이런 얘기 못 해’라고 짐작하고 상대의 입을 막아버리곤 하죠. 저는 그 짐작에서 시작되는 무시와 침묵, 배제에 특히 민감해요.
Q.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세월호, 이태원 참사 같은 큰 사건이 있을 때마다 ‘내가 그 자리에 없었다’는 점이 늘 마음에 걸렸어요. 여러 사정이 있었겠지만, 죄책감이 남더라고요. 이번엔 민주주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왔고, 그 자체만으로도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보자고 생각했어요. 말하는 일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시작이라고 믿으니까요.
설문조사 결과보기
시민 3명의 인터뷰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민주주의는 제도보다 일상 속 태도와 관계에서 실현된다는 점입니다. 거리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시민들이 느끼는 갈등과 균열은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생생한 현장이기도 합니다. 의견이 다르더라도 서로 말할 수 있는 환경, 다름을 견디는 경험이 민주주의의 토대가 된다는 인식도 이어집니다.
이러한 과정은 불편하고 때론 아프지만, 결국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위한 과정처럼 보입니다. 정치는 거창한 말이 아니라, 내가 말할 수 있는 자리를 상대방에게도 열어주고 지켜내는 노력에서 시작됩니다. 민주주의는 우리 삶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인터뷰 진행: 방연주 시민연결팀 연구위원, 이규리 시민연결팀 선임연구원
인터뷰 정리: 방연주 시민연결팀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