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공동체 자산을 쌓기 위한 조건

희망제작소가 지난 9월 30일부터 10월 4일까지 닷새 동안 서울, 경기, 대전, 전남 영암군 등지에서 <지속가능한 로컬, 민주주의 경제모델 구축 국제포럼>을 개최했습니다. 이번 국제포럼은 지역 공동체 자산 구축(Community Wealth Building, CWB) 전략을 이해하는 자리로 마련됐습니다. 특히 영국 프레스턴시 의회 의장인 매튜 브라운과 미국 싱크탱크인 ‘협력하는 민주주의’ CWB 글로벌 리더인 닐 맥킨로이가 다양한 지역 공동체 자산 구축(CWB) 사례들을 소개했습니다.

무엇보다 닐 맥킨로이는 “지역 공동체 자산 구축(CWB) 모델은 영감을 주는 원천”이라고 말했습니다. 영국, 네덜란드, 미국, 호주 등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지역 공동체 자산 구축(CWB) 전략이 시도되고 있지만, 모두 똑같은 모습이 아닙니다. 지역적 상황과 특색을 반영한 경제전략 모델로서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지역 공동체 자산 구축(CWB) 전략을 구성하는 5개 기둥인 ▲공정한 노동 ▲지역 금융 ▲토지와 자산의 공정한 이용 ▲진보적 조달 ▲포용적이고 민주적인 기업 중에서 어떤 기둥을 중점적으로 추진하느냐에 따라 지역의 자원과 추진과정도 각기 다르게 나타납니다. 이번 국제포럼에 참여한 지방자치단체, 사회적경제조직, 연구자 등 다양한 주체들이 건넨 논의를 통해 향후 방향성을 짚어볼 수 있었습니다.

▲ 닐 맥킨로이가 발표하고 있다.

종합토론에 나선 홍기빈 글로벌경제연구소 소장은 공동체 자산 구축의 성공을 위해서는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홍 소장은 “국내에 소개된 공동체 자산 구축을 둘러싸고 ‘물질적 부의 증대’ 위주로 논의가 이뤄지는데, 무엇보다 지자체, 앵커기관, 풀뿌리 시민의 움직임을 통해 시너지를 내는 게 곧 공동체 자산”이라고 말했습니다. 서로 긴밀한 네트워크를 지닌 곳일수록 작은 규모라도 큰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반면, 빈약한 네트워크에서는 대규모 자금이 투입되더라도 실패의 가능성이 높은 만큼 지역 공동체 자산의 근간을 잘 살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박정현 부여군수가 발표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들은 지역 공동체 자산 구축(CWB) 전략과 유사한 사례 혹은 시사점을 공유했습니다.

먼저 충남 부여군에서는 ‘굿뜨레페이’로 지역경제의 마중물을 만든 사례를 전했습니다. 지역화폐는 우리에게 익숙한 지역 정책이지만, 부여군에서는 지역 내에서 ‘화폐’가 쓰이는 데 그치지 않고, ‘지역화폐’로 머물도록 힘쓰고 있습니다.

박정현 부여군수는 “굿뜨래페이는 자체적인 앱 결제방식을 통해 ‘페이’를 ‘원’으로 바꾸지 않고 바로 지역 내 다른 가맹점에서 사용할 수 있다”라며 지역 내 순환형 지역화폐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전남 신안군에서는 지리적 이점을 극대화해 지역 자산의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월등한 일조량과 대규모 토지를 활용해 인구소멸 위기를 타개하는 시도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단기적 관점보다 장기적 관점으로 지역자원을 활용하는 셈입니다.

신안군은 해상풍력을 이용한 신재생에너지 사업에 따른 이익을 지난 2021년부터 주민들에게 개발이익 배당금으로 지급하거나, 만 18세 미만 아동에게 ‘햇빛아동수당’ 등으로 지급하고 있습니다.

▲ 박우량 전남 신안군수가 발표하고 있다.

김종훈 울산 동구청장은 지역 공동체 자산 구축(CWB) 전략을 국내에 적용하기 위해선 ‘지역분석’을 시급한 과제로 꼽았습니다. 울산시는 조선업 중심의 산업 도시이지만, 지난 8월 18년 만에 인구가 110만 명 아래로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습니다(행정안전부 주민등록인구통계 기준). 김 구청장은 “조선업 기업의 발전과 지역의 발전 전략이 부합하지 않지만, 시민이 좋은 일자리를 통해 안정된 소득을 얻는 게 지역 경제의 연료가 된다”라며 공동체 자산 구축의 필요성에 공감했습니다.

예컨대 울산에 위치한 한 대학병원에서는 환자복을 수거해 세탁하는 비용만 30억 원을 해당 지역이 아닌 외부 지역에 위치한 기업에 비용을 지출하고 있었습니다. 김 구청장은 “울산에서 세탁소 하나만 제대로 만들어도 자원이 유출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밥벌이할 수 있지 않겠냐”라며 지역의 ‘숨은 자원’과 ‘숨은 유출’을 파악해 분석하는 과정이 지역 공동체 자산 구축의 디딤돌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이밖에 퇴직자협동조합, 남목마을관리사회적협동조합, 마을교사협동조합 등의 설립을 지원하며 네트워크 강화에 힘쓰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김종훈 울산 동구청장이 발표하고 있다.

전은호 모라비안앤코 커뮤니티브랜딩 본부장은 ‘한국판’ 지역 공동체 자산 구축(CWB) 사례인 시민 자산화 사례를 소개했습니다. 국내에서는 지난 2015년 서울시의 젠트리피케이션(도심 인근의 낙후지역이 활성화되면서 외부인과 돈이 유입되고, 임대료 상승 등으로 원주민이 밀려나는 현상) 종합 대책의 일환으로 ‘자산화’ 전략이 처음 도입됐는데요. 당시만 해도 도시 문제의 원인을 ‘자산 불평등’ 문제로 정의하고,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쫓겨나는 상인들을 저리 대출을 통해 지원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수요가 잘 모이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전 본부장은 “정책 시스템 하에서 시민들을 필요로 하는데, 정작 시민이 주인일 수 있는 장은 많이 열리지 않았다”라고 지적했습니다. 지역 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역 자산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속도’보다 ‘방식’이 중요하다는 점을 엿볼 수 있습니다. 즉, 시민이 작은 실험을 시도하면서 서로 연결되고, 협력하는 조직으로 나아갈 때 ‘지역 자산화’의 기반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겁니다.

지난 2019년부터 지역민 중심의 커뮤니티 오너십을 통해 지역 문제를 해결하도록 지원하는 방식으로 변화한 것도 공공·외부 자원이 정책을 주도하는 데서 벗어나 지역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역량을 갖고 있다는 관점으로 바뀐 것입니다. 실제 경기도가 실시하고 있는 ‘사회적경제조직 협동자산화’도 그 일환입니다. 지난 2023년 노인·장애인 돌봄, 지역공동체, 시민교육공간, 지역자활기업 등에 22억 원을 지원했고, 올해는 5개 조직에 40억원 규모의 자산화 조직을 추진 중입니다.

희망제작소가 주최한 '지역순환경제 국제포럼' 현장 소식을 전합니다.
▲ 지난 4일 경기도의회 대회의실에서 개최된 <지속가능한 로컬, 민주주의 경제모델 구축> 국제포럼 현장. 매튜 브라운(사진 앞줄 맨 왼쪽에서 다섯 번째) 닐 맥킨로이(여섯 번째)

짧지만 긴 여운을 남긴 매튜 브라운과 닐 맥캔로이의 지역 공동체 자산 구축(CWB) 전략은 앞으로 한국에서 어떤 모습으로 구현될까요. 희망제작소가 발견한 희망도 있습니다.

두 사람이 보여준 주류 경제 시스템의 변화를 고민하는 과정과 지역에서 거둔 성공 경험들은 경제 전략의 주체와 방식, 방법 등이 늘 고정된 ‘상수’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수그러드는 지역의 숨을 불어넣기 위해 단 한 사람이 필요한 게 아니라 다양한 주체들과 주민들 스스로 숨을 불어넣고, 책임지는 것. 이 지점에서부터 변화는 시작될 거라 봅니다.

-글: 방연주 시민연결부문 연구위원 | 사진: 희망제작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