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초 전문가로 나선 80대 할머니들의 도전

전국 지역에서는 청년들이 일군 임팩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희망제작소가 이들을 ‘소셜디자이너’라고 호명하는 이유입니다. 나의 성장이 로컬의 변화로 이어지는 소셜디자이너들의 다채로운 활동과 이야기를 특집으로 전합니다. 오는 11월 14일 개최되는 청년 소셜디자이너를 위한 무대 ‘2024 사회적가치 투자(Social Investor Relations, SIR) 대회’에서도 생생한 임팩트 경험담이 펼쳐집니다.  

김승화 비유니크 이사 | 충남 천안

천안 남산마을 향초전문가 할머니들이 만드는 소이캔들 ‘그랜마’에선 이른 아침 텃밭의 싱그러운 풀 내음이 납니다. 햇볕에 말린 이불처럼 뽀송뽀송한 향의 이름은 ‘스누즈(낮잠)’이고, ‘마실’은 산책길 바람결에 실린 꽃과 과일 향기예요. 남산마을엔 향초 전문가 자격증을 보유한 70~80대 할머니들이 11명이나 됩니다. 이분들이 마을의 링크앤라이프 릴리(이하 릴리) 공방에 모여 작정하고 만들면, 하루에 향기주머니(샤쉐) 1500개는 너끈합니다.

천안 구도심의 낡고 오래된 주택가, 젊은이들이 모두 떠나 거대한 경로당 같던 남산마을을 향기 가득하고 활력 넘치는 곳으로 바꿔낸 건 디자인회사 ‘비유니크’의 김승화 이사와 강민서 대표입니다. 미술대학 동기동창인 두 사람은 각자 디자이너로 경력을 쌓은 뒤 함께 디자인회사를 창업했어요.

그런데 “이대로만 사업하면 BMW 탈 수 있겠다”고 농담하던 두 사람의 인생에 난데없이 남산마을이 등장합니다. “칠십 평생 처음 물감을 만져 본다”며 즐거워하는 할머니들을 아연실색 바라보다 그만 책임감이 생겨버렸습니다. 그때부터 인생이 꼬였는데 김승화 이사는 “남들과 똑같은 길을 가면 이런 재미를 못 느낄 것 같다”며 웃습니다. BMW와 맞바꾼 릴리 공방엔 오늘도 무해하고 천진해서 자꾸만 맡고 싶은 향기가 가득합니다.

▲ 김승화 비유니크 이사

새로움에 대한 갈증… 오래된 마을에서 발견한 설렘

-남산마을 할머니들을 어떻게 만나게 됐나요.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기막힌 우연이에요. 저와 강민서 대표는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함께 창업했거든요. 저희의 첫 번째 꿈이 독립된 회사를 꾸리는 것, 두 번째 꿈은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었죠. 그런데 디자인에이전시 일이 아무래도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맞춰야 하잖아요. 어떤 목마름 같은 것이 있었어요. 시간 날 때마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우리만 할 수 있는 새롭고 재밌는 일을 찾아봤죠. 2019년에 강 대표 고향인 천안을 둘러보다가 남산마을 도시재생 설명회를 한다는 포스터를 봤어요. 당시엔 도시재생이 뭔지 몰랐고, 궁금해서 설명회에 갔더니 할머니들이 모여 있고 분위기가 참 좋은 거예요. 저와 강 대표 둘 다 어릴 적 할머니 손에 커서 할머니들을 보면 왠지 편안하거든요. 설명회를 연 회사 대표님이 저희를 무척 반기시면서, 앞으로 남산마을 도시재생 사업을 할 건데 한 파트 맡아서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셨어요.

▲ 천안에서 가장 오래된 남산마을 풍경

당시 남산마을은 오래된 집들이 많고 비가 오면 인근 하천이 범람해서 침수위험도 있었어요. 젊은이들이 빠져나가고 노인들만 남아서, 별다른 활동도 없이 컴컴한 집에 종일 혼자 계시더라고요. 모여서 하시는 일도 화투치기 정도고요. 생각해봤어요. 나는 나이가 70살, 80살이 되어도 새로운 걸 배우고 경험하면서 살고 싶은데, 남산마을 할머니들 중에도 그런 분들이 계시지 않을까?

할머니들에게 새로운 걸 배우고 경험할 기회를 드리고 싶다는 생각에, 마을에 공방을 열고 예술활동이 결합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했어요. 그런데 ‘태어나서 처음 물감을 만져본다’는 분들이 많은 거예요. 물감은커녕 연필로 글씨를 써본 적 없는 할머니도 계셨어요. 그분들과 함께 집 앞에 화단을 만들고 그림엽서도 그리고…. 처음 해보는 일에 도전하실 기회를 많이 만들었죠. 차츰 활동에 재미를 붙인 적극적인 할머니그룹이 형성됐어요.(웃음)

▲ 천안에서 가장 오래된 남산마을 풍경

노년의 ‘향기로운 ’ 성장, ‘할머니그룹’의 도전 

-할머니들과 함께하던 마을공동체 활동이 ‘링크앤라이프 릴리’라는 새로운 브랜드 탄생으로 이어졌군요. 자기만의 브랜드를 만들고 싶은 두 번째 꿈도 이룬 셈인데, 원래 향기 제품에 관심이 있었나요.

=큰 관심은 없었어요. 할머니들과 함께 해볼 수 있는 일이라서 선택한 거죠. 마을에서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막상 할머니들에게 돌아가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엔 새로운 경험의 기회를 드리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일회적인 경험만으론 할머니들이 어두운 집에 온종일 혼자 계시는 걸 막을 수 없겠다 싶었죠. 할머니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이 돌아가는 일, 본질적이고 지속적인 변화를 만들고 싶었어요.

할머니들이 향초 전문가 과정을 이수하고 자격증을 취득하시도록 한 것도 그래서예요. 새로 배우는 걸 넘어서 자격증까지 따면 성취감을 느끼고 자신감도 생기실 테니까요. 비즈니스 측면에서도, 그런 전문성을 가진 분들이 제품을 만들어야 고품질을 유지하고 소비자들의 신뢰도 받을 수 있겠죠. 할머니들이 만드는 제품이니까 돕는 셈 치고 사준다거나, 반대로 할머니들을 못 믿어서 안 산다는 얘길 듣고 싶지 않았어요. ‘릴리의 모든 제품은 전문가 자격을 갖춘 직원들이 책임생산한다’는 브랜드 이미지를 만들고 싶었죠. 최고령자인 86세 이영섭 할머니를 포함해서 총 열 한 분이 자격증을 취득하셨어요. 

▲ 릴리의 모든 제품은 전문 자격증을 보유한 남산마을 할머니들이 제작한다.

-향기 이름이 ‘그랜마’, ‘스누즈(낮잠)’, ‘마실’인데, 남산마을 할머니들에게 영감을 받았나요.

=할머니들의 편안함과 푸근함을 담고 싶었어요. 향은 우리 일상 속 어디에나 있는 편안한 것이어야 하는데, 사실 백화점에서 파는 향들은 부담스럽고 가격도 만만치 않잖아요. 어릴 적 할머니 댁에 갔던 기억도 모티브가 됐어요. 할머니 집에만 가면 낮잠이 솔솔 왔거든요. 낮잠 자려고 툇마루에 누우면 할머니 텃밭에선 싱그러운 풀 냄새가 나고 할머니가 덮어주신 뽀송뽀송한 이불에선 햇볕 냄새가 났어요. 한숨 자고 일어나 시골길을 걸으면 들꽃 향, 과일 향이 나고요. 이런 것들을 모티브로 전문 조향사와 함께 3개의 향을 조향하고 알러지프리 향료를 사용해 디퓨저, 소이캔들, 룸스프레이, 사쉐(향기주머니) 등 4개 제품을 개발했어요. 저희 브랜드의 핵심은 ‘편안함’이에요. 할머니집에서 낮잠을 자는 자듯 편안한 향, 알러지 염려 없는 안전한 성분, 시각적 피로감이 가장 적은 녹색과 따뜻한 느낌의 명조체를 사용한 상품 패키지가 어우러져 편안하고 기분 좋은 브랜드로 소비자들에게 다가가고 싶어요.

▲ 릴리의 모든 제품은 전문 자격증을 보유한 남산마을 할머니들이 제작한다.

할머니들의 오늘을 위해, 할머니가 될 나의 미래를 위해

-제품을 개발하고 브랜드 론칭하는데 필요한 자금은 어떻게 마련했나요. 사회적기업 인증을 받지 않기로 해서 관련 지원도 받지 못했을 텐데요.

=비유니크의 디자인 수익을 릴리에 쏟아부었죠(웃음). 2022년에 릴리를 공식 론칭했는데, 여전히 디자인 일을 병행하고 있어요. 그동안 패션 브랜드 르아보아와 협업하고 백화점 한 코너에 입점도 하면서 매출이 조금씩 늘고 있지만 충분하진 않거든요. 릴리가 소비자들에게 각인되고 B2C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마케팅과 브랜딩, 신제품 개발에 더 투자해야 해서, 당분간은 겸업을 계속해야 할 것 같아요.

사회적기업 인증을 받지 않은 것도 그래서예요. 사회적기업 인증을 받으려면 서브잡을 하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디자인기업으로 인증을 받든지, 릴리로 인증을 받든지 선택해야 한다는 거예요. 릴리가 언제 궤도에 올라 수익을 낼지 알 수 없고 상당기간 투자가 필요한데 정부 지원만 믿고 디자인 일을 안 할 순 없다고 판단해 당분간 사회적기업 인증을 받지 않기로 했어요.

사실 릴리 수익이 충분치 않은데는 저희가 할머니들과 재밌는 활동을 많이 하기 때문이기도 해요. 작년에는 전문 메이크업 아티스트와 사진작가들의 도움을 받아서 할머니들의 프로필 사진을 찍었어요. 꽃꽂이 전문가를 모셔서 할머니들과 함께 작업한 후 사진을 찍기도 했고요. 릴리가 팝업스토어나 기획전에 참여할 때 할머니들을 모시고 나들이 겸 함께 가기도 해요. 할머니들은 월급을 받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새로운 곳에 가보고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게 더 좋으시대요. 수익이 좀 적어도 이런 일들을 그만두고 싶지 않아요. 저희가 릴리를 만든 이유가 할머니들의 삶을 바꾸는 데 있으니까요.

▲ 꽃꽂이 수업 행사에 참여한 남산마을 할머니


– 앞으로의 계획을 들려주세요.

= 릴리 브랜드와 제품을 더 널리 알려서 부업을 하지 않고 릴리에만 충실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 할머니들과 더 좋은 제품을 만들고 새로운 경험을 더 많이 하는 것,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언젠가 제가 할머니들만큼 나이 들었을 때 새로운 것을 배우고 경험하며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에요.

글: 이미경 희망제작소 연구위원 | 사진: 비유니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