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빌런’이 되고 싶지 않아요!

전국 지역에서는 청년들이 일군 임팩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희망제작소가 이들을 ‘소셜디자이너’라고 호명하는 이유입니다. 나의 성장이 로컬의 변화로 이어지는 소셜디자이너들의 다채로운 활동과 이야기를 특집으로 전합니다. 오는 11월 14일 개최되는 청년 소셜디자이너를 위한 무대 ‘2024 사회적가치 투자(Social Investor Relations, SIR) 대회’에서도 생생한 임팩트 경험담이 펼쳐집니다.

우동준 일종의격려 대표 | 부산

부산에서 나고 자랐지만, 평생 발 딛고 살아온 도시가 낯설게 느껴지는 건 한순간이었습니다. 군대 유해발굴단에서 처음 본 백골 사체가 제가 살던 곳 바로 옆 동네에서 발견되었답니다. 그것도 고독사라니. 무얼 어떻게 해야 할까 인맥도 자원도 없었지만, 뭐라도 해보자는 마음에 피켓 하나만 들고 무작정 거리로 나섭니다. 컴퓨터를 잘 다룰 줄 몰라 글자를 종이에 인쇄해 한 글자씩 오려 붙인 모양입니다.

다른 이는 바삐 직장으로 향하는 출근길, 그는 피켓과 가방 하나 짊어지고 매일 지하철역 앞에 섭니다. 수많은 사람이 ‘쌀을 주시면 홀로 사는 어르신들과 같이 밥을 먹겠다’는 글자를 읽곤 지나칩니다. 며칠 해보고 안 되면 말지, 스스로를 달랜 지 사흘 만에 한 중학생이 쌀 한 봉지를 건네옵니다. 그대로 지역 복지관에 찾아가 함께 밥 먹을 어르신을 연결해달라 요청했고, 그렇게 계절이 세 번 바뀌고 모인 쌀이 120kg 가까이 될 때까지 매주 동네 어르신과 수저를 들었습니다.

그렇게 ‘활동’인 줄도 모르고 마음이 움직여 시작했던 시간이 쌓여 일이 되고 관계가 되고 직업이 되었습니다. 처음 지하철역에 섰던 것처럼, 그는 지금도 관계와 교류가 필요한 사람을 찾고, 만나고, 연결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버텨야 하는 이곳, 오늘의 도시에서 위로와 다정함을 연결하는 우동준 일종의격려 대표를 만났습니다.

부산근현대역사관에서 인터뷰 중인 우동준 일종의격려 대표 © 희망제작소

– 어떻게 활동을 시작하셨어요.

=아침에 쌀 모으러 나가는 길에 동네에 있는 농아인 전문학교를 지나다니다 보니, 막연히 다음 프로젝트는 수어와 관련된 활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쌀 캠페인 이후로 조금씩 주변을 돌아보고 관심갖게 된 영향인 것 같아요. 그러다 우연히 학교 선배였던 농아인 형을 만나 수어를 배웠고, 그 계기로 여러 또래를 만나면서 장애인·비장애인이 평범하고 재미있는 청년기를 보내는 모습을 기록했어요. 그때는 유튜브가 아니라 UCC였거든요? 같이 바다도 보러 가고, 농구도 보러 가고, 친구에게 “왜 너만 할인받아 싸게 보냐?” 이런 농담도 하고 하하하. 또래끼리 모이다 보니 자연스레 청년의 문제를 고민하게 되었고, 정책 거버넌스 활동까지 이어져서 광안리에 ‘생각하는 바다’라는 청년 공간도 만들었고요, 지금도 소속되어 활동 중인 ‘(사)부산청년들’이라는 단체의 초창기를 함께 보내면서 글도 쓰고 활동했어요.

– 처음부터 ‘활동’으로 돈을 벌 수 있었던 건 아니잖아요. 계속 활동하기 위한 수익 창출 활동을 해오신 것 같네요.

=활동 초기부터 자원이 없으니까, 수입 마련을 위한 일을 따로 했어요. 주로 청소 일을 했거든요, 계단 청소나 목욕탕 청소. 일자리가 없는 부산에서 고졸 청년이 맡을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으니까요. 그러면서 여러 복잡한 감정과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 활동하는 청년들은 대부분 대학생이거나 대졸이었거든요. 그들은 활동하면서도 대학원으로, 기관으로, 정치로, 공무원으로…. 어디든 가는 것 같은데 나는 그런 게 없다는 상대적 결핍이 있었어요. 무척 힘들었지만 그래도 활동을 계속 해 나가자 마음 먹었던 계기가 있어요. 쌀 캠페인으로 같이 밥을 먹으며 얼굴을 뵈었던 할머니 한 분께서 돌아가셨는데, 이후에 복지사님이 저에게 이런 얘기를 해주시더라고요. 홀로 사시던 분이라 말도 거의 없으시고 감정도 무던한 조용한 분이셨는데, 어느 날부터 “그 총각 언제 오냐”면서 저를 기다리셨다고. 그분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걸 굉장히 오랜만에 보았다고요. 활동하면서 지치고 포기하고 싶을 때 계속 그 순간들이 떠올라요. 나도 누군가 한 사람의 삶 안에 ‘다름’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이구나.

2014년 부산 지역 내 1인가구와 고독사 문제를 환기하는 캠페인을 위해 매일 지하철역 앞에서 피켓을 들었다. © 우동준

– 부산에서 현장 중심 활동을 하면서 굉장히 다양한 사람을 만나오셨네요. 엄청난 장점 아닐까요! 만난 사람이 거쳐온 경로와 관심 주제도 다양하고요.

=캠페인으로 활동을 시작한 사람이라 거리가 익숙했던 것 같아요. 부산에서 부동산 재건축이 큰 이슈였을 때라 치열하게 거리 투쟁하고, 고공 농성하는 현장 곳곳에서 함께하면서 도시 안에서의 불평등을 몸으로 체감했어요. 전국의 투쟁 현장들을 찾아다닌 적도 있어요. 세월호 유가족을 만나 뵙고 뭐라도 돕고 싶어서 정확한 근거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동거차도 산등성이를 찾아간 적도 있네요. 제 삶을 돌이켜볼 때, 쌓이는 것 없이 순간순간의 접점만 통과해 왔다는 생각이 들곤 해요. 성취감을 쌓기 힘들었고 외로웠어요. 스스로는 뭔가 열심히 하고 있는데 그걸 인정받고 알아주는 사람도 조직도 사회도 없다고 느꼈거든요.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하나의 주제가 농익기 전에 관심 가질 다음 주제를 계속 발견한 덕분에 지금껏 활동을 지속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도 들어요. 균형을 잃고 관성적인 태도로 문제를 바라보는 순간을 늘 경계하면서 활동 중심을 옮겨왔어요. 그간 거쳐온 세계가 복잡한 만큼 다양한 사람을 조우한 경험과 인연이 자원이기도 하고요. 지금 함께 일하는 동료들도 대부분 활동 과정에서 만난 이들이거든요.

– 2022년부터 일종의격려를 설립해 운영 중이죠.

=우연히 사회적기업가육성사업 교육을 받고 일종의격려를 만들었어요. 완전히 새로운 주제를 찾는 게 어려워서 헤매다, 이전에 내가 만났던 주제와 사람을 심화시켜 보자는 생각으로 시작했어요. 그래서 대상은 ‘나’였어요, 고졸 일용직 청년. 나와 같은 사람들이 자기에 대해 잘 알 수 있도록 만들고, 밖에 나와서 서로 만나고 교류하도록 돕는 서비스의 토대를 만들어보자는 게 핵심이었죠. 그러다 보니 커뮤니티를 운영할 수 있는 도구를 개발할 필요를 느꼈어요. 그래서 만들어진 게 내면 탐색 워크숍을 위한 심리 탐구 체험 보드게임 ‘에고(Ego) 아일랜드’에요. 활동하면서 알게 된 직업상담사, 심리상담사 동료들과 2년에 걸쳐서 개발했는데 꽤 인기가 좋습니다.(웃음) 부산 전역에서 이 도구를 활용해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고요. 부산경제진흥원, 부산청년센터 등 다양한 지역 내 공공기관과 협업해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대상자는 주로 청소년과 니트 청년이고 최근에는 가족 단위로 대상을 확대해 진행하고 있어요.

<에고(Ego) 아일랜드>는 섬을 테마로 한 보드게임으로, 내면 탐색을 위한 워크숍에 활용하기 위해 개발된 워크북이다. © 우동준

‘에고(Ego) 아일랜드’ 흥행에 힘입어, 진로교육 프로그램 보드게임 ‘6인의 항해자’도 개발을 하였습니다. 주로 초중생을 대상으로 워크숍을 진행하는데 지역 내 중학교에서 특히 반응이 좋아요. 이외에도 커뮤니티 소셜다이닝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는데요, 섭식장애를 완화하는 치유 교육 프로그램으로 개발되었으며 일상을 회복하고 삶의 밸런스를 찾는 소셜다이닝입니다. 수프와 연관된 일상 콘텐츠를 기반으로 책과 돌봄 커뮤니티를 결합하였고요. 이 프로그램은 주로 청년이나 중년 등 혼자 사는 1인가구를 대상으로 사업을 진행합니다.

<에고(Ego) 아일랜드>는 섬을 테마로 한 보드게임으로, 내면 탐색을 위한 워크숍에 활용하기 위해 개발된 워크북이다. © 우동준

– 하나의 직업으로 온전한 수익을 창출하기 어려운 탓인지 혹은 요구받는 역할이 다양한 탓인지, 로컬 소셜디자이너는 ‘N잡러’인 경우가 많아요. 대표님도 ‘일종의격려’외에도 부산에서 다른 일들을 하고 계시나요.

=하고 싶은 것을 따라오다보니 지금은 사회적기업으로 ‘일종의격려’를 운영하고 있는데요. 청년 사업가, 문화 기획자, 커뮤니티 매니저, 캠페이너…. 다양한 직함으로 불리지만 가장 오래 가져온 정체성은 작가예요. 성과는 잘 나오고 있지 않지만요. 4권의 책을 썼는데 1쇄를 넘긴 책이 없거든요. 그래도 저는 계속 읽고 쓰는 사람으로 남고 싶어요. 대학원 진학도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들을 더 잘하고 싶은 마음에서 결정한 일이에요.

첫 번째로는 제 삶의 연구 과제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 때문인데요.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상당 수 프로젝트에서 연구진으로 참여할 수 없더라고요. 제가 가진 문제의식을 더 깊이 있게 파고들며 하고 싶은 일을 계속해나가려면 학위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두 번째 이유는 ‘빌런’이 되고 싶지 않아서입니다.(웃음) 지역에서 10년 정도 활동하다 보니, 자연스레 저에게 자꾸 발언권이 생기더라고요. 이건 지역의 특수성인 것 같기도 해요. 역량이 덜 갖춰졌다고 생각하는데 단순히 연차가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마이크가 제게 오는 것이 긴장됐어요. 주변 동료들이 “나이 서른 넘어서 혼나는 곳은 대학원밖에 없다!”고 하더라고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인 거예요. 공공기관? 컴플레인 안 하죠, 다음에 그냥 일 안 하면 되니까. 동료들? 뭐라고 안 하죠, 일 그만두지. 엄청 혼나야겠다는 각오로 절치부심해서 대학원까지 가게 되었어요.

아니나다를까, 엄청 혼났죠. 대자보 쓰듯이 논문을 썼거든요. 활동가로 오래 지내왔다보니 그간 썼던 글은 날카로워요. 엄청 강렬하죠. 세게 말해서 주목을 받고 누군가를 논의 테이블에 앉히는 게 중요하니까요. 근데 지금 글은 그렇지 않거든요. 어떻게 보면 과거에 비해서는 힘도 많이 빠지고, 차분하고, 심심하기도 하겠죠. 그렇지만 그때보다 객관이라는 틀을 갖추려 애쓰고 있음이 느껴져요. 이런 관점과 습관은 ‘일종의격려’를 운영하는 데에도 영향을 많이 끼치고 있어요. 활동의 이유와 목표를 자의적으로, 그럴듯하게 표현할 게 아니라 구체적인 근거를 기반으로 표현하려고요.

2022 부산청년주간에서 발제를 하고 있는 우동준 대표 © 우동준

– 고립과 연결의 시대, 그럼에도 커뮤니티는 유효할까요? ‘일종의격려’에서 진행되는 대부분의 사업은 커뮤니티 기반이잖아요.

=활동 초기에는 커뮤니티에 대한 제 나름의 정의를 하려고 애썼어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 커뮤니티는 너무 당연하고 기본적인 요소인데, 그걸 한 문장으로 규정하려 했던 과거도 유별났다고 느껴지더라고요. “커뮤니티란 무엇이다”를 정의해버리는 순간, 저를 둘러싼 환경이 이분법적으로 ‘그런 곳’과 ‘아닌 곳’으로 나뉘더라고요. 누군가의 커뮤니티를 제 마음대로 단정지어버리는 것 같기도 했고요. 요즈음은 커뮤니티가 너무 당연해서 오히려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쉽게 나오지 않는 것 같아요. 사람이 살아남기 위한 생존 요소로서 커뮤니티가 필요하다는 대전제는 이미 여러 사례를 통해 증명됐잖아요. 가령 “고립은둔청년이 죽음으로 간다”는 도식은 커뮤니티와 연결이라는 것이 생존과 직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니까요.

결국 제가 ‘일종의격려’를 통해서 만들고 있고 앞으로 만들어 가려고 하는 것들은 제가 맨 처음 시작했던 쌀 캠페인의 연장선에 있는 셈이죠. 고독사 백골은 지금도 여전히 발견되고 있잖아요. 재개발 지역 주민, 중장년 1인가구, 유형별 장애이웃, 니트청년…. 우리 사회가 ’사회적약자’로 그룹화한 이들에겐 여전히 사회안전망이 없어 존재조차 발견하기 어렵고요. 커뮤니티와 연결의 유무가 생존과 직결되는 만큼 누군가에게 유의미한 도움이 되고 도시에서 상처받은 이들이 회복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함께하는 사람들이 편안한 따뜻한 커뮤니티가 많아지면 이 삭막한 도시도 관계로 채워지지 않을까요?

– ‘일종의격려’를 통해 지금 만나고 있는 부산 청년들과 무엇을 만들고 싶나요?

=부산이 청년 개인이 가진 자신의 니즈를 잘 해소하는 도시가 되면 좋겠어요. 저한테 도시라는 건 ‘밀도’거든요? 아무리 도시가 커도 밀도가 낮으면 청년이 살아가기 어려운 환경이 되어요. 그래서 제가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부산이라는 도시의 밀도를 높게 유지하는 거에요. 그건 나라는 사람과 너라는 사람이 계속 만나면서 부딪히는 것이고요. 어딜가든 그런 마주침이 보장되고, 누군가의 사례가 나에게 전달되고, 공공서비스나 정책이 당사자에게 가닿고. 그게 제가 지향하는 도시의 모습이에요. 부산은 절대적인 자원이 부족한 지역이 아니에요. 연결과 순환이 문제인 거죠. 다양한 청년 정책이 펼쳐지고 있지만 협소한 관계망 탓에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저는 이 부산이라는 도시 안에서 밀도가 높은 편이거든요? 지금 인터뷰를 여기(부산근현대역사관)에서 인터뷰를 하는 이 순간에도 뒤로 오가는 근로자분들과 눈인사를 계속 하고 있어요. 부산 어떤 지역을 가서 글쓰기 워크숍을 하든 로컬 팝업을 나가든 아는 사람이 두 명 이상은 있고요. 부산에서 활동하는 제 이야기에 관심을 주시고, 직접 서울에서 이곳까지 찾아주신 희망제작소 최나현 연구원님도 계시고요. 그러니까, 제게는 존재감을 인정해주는 관계가 많이 있어요.

가만히 있어도 저를 알아봐주는 연결된 관계가 많이 있어요. 그래서 저에게 부산은 밀도가 높은 공간이고, 대도시죠. 그런데 모든 부산 청년이 그렇지는 않잖아요. 누구에게나 도시와 로컬은 상대적이지만 저에겐 특히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이 도시에 사는 청년 사이의 격차를 줄여나가고 싶어요. 청년이 노력하지 않아도 밀도 높은 환경에서 지낼 수 있도록 만들고 싶어요. 애써 나서서 무언가를 획득하거나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관계와 사회와 제도에 노출되고 새로운 자극과 정보가 비자발적으로 주어지는 환경. 그게 제가 ‘일종의격려’를 통해 만들고 싶은 부산입니다.

-글: 최나현 희망제작소 선임연구원 | 인터뷰 정리: 손호석 객원연구원 | 사진: 일종의격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