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다른 존재의 ‘무릎’이 필요하지

몽덕희망원정대장의 남해 도전기! ‘인간관계 신생아’인 중년여자와 간식말고는 도통 관심 없는 몽덕대장 과연 남해 중에서도 남쪽 끝에서 동네책방으로 안 망하고 연결의 꿈을 이룰 수 있을까요? 몽덕 대장은 손님을 내쫓지 않을 수 있을까요? 한 달에 한 번 전합니다. 

누구에게나 다른 존재의 ‘무릎’이 필요하지

안 망할지도 몰라, 남해 동네책방 ⓵

지난 4월 24일 저녁 7시 30분, 경남 남해에서도 남쪽 끝, 상주면 은모래해변으로 반려견 몽덕이가 흰 궁둥이를 흔들며 달려갔습니다. 경기도 고양시부터 7시간 운전해 내려왔습니다. 어스름이 깔린 해변은 텅 비었습니다. 이삿짐을 실은 1톤 용달차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배낭엔 아침에 엄마가 꾸역꾸역 넣어준 샌드위치가 찌그러져 있어요. “짐 늘게 왜 이런 걸 싸줘.” 새치가 희끗희끗한 딸이 70대 노인 엄마에게 아침부터 짜증을 냈더랬습니다. 해변에 쪼그리고 앉아 샌드위치를 허겁지겁 먹었습니다. 손가락에 흐른 소스까지 싹싹 빨아먹었습니다. 허기가 졌어요. 나는 왜 여기 있을까?

이삿짐 아저씨는 저녁 8시 30분에 남해의 어두운 골목에 도착했습니다. 아침부터 불길했어요. 큰 짐이 없어 아저씨와 부인 둘이 오기로 했는데 아저씨 혼자입니다. 부인은 남편 전화를 모두 씹어버렸어요. 싸운 거 같았습니다. 아저씨는 노끈 다발을 꺼내더니 책을 대여섯 권씩 묶기 시작했습니다. 족히 500권은 남았습니다. 저도 같이 앉아 책을 묶었어요. 아저씨는 신세 한탄을 했고, 부인은 끝까지 화가 풀리지 않았습니다. 하세월이었습니다.

짐은 제가 미래에 ‘인간AI’라고 부를 K의 손님용 원룸에 부렸습니다. 이사 한 주 앞두고 계약이 어그러져 갈 집이 없었어요. 5평 남짓한 방에 머물며 집을 구해보기로 했습니다. 이불 짐을 풀어보니 간장에 절었어요. 이삿짐 차 안에서 간장통이 깨졌던 거예요.

지난해 5월 남해는 아름다웠습니다. 돌이켜보면 아름다운 것들은 위험합니다. 오목한 해안선을 따라 동그란 전구들이 반짝였습니다. 산자락과 해안선이 이어 달리고 그 사이사이 안긴 마을들은 저마다 색깔이 달랐습니다. 그때 이종수 동고동락협동조합 이사장을 인터뷰했습니다.

그는 소비 대신 생태, 경쟁 대신 연대, 개인 대신 느슨한 공동체의 꿈을 얘기했습니다. 실제로 이 마을은 그 방향을 향해 가고 있는 거 같았어요. 폐교 위기에 놓였던 상주중학교가 2016년 대안학교로 바뀌면서 부모들이 하나둘 모여들었습니다. 학부모들이 뭉쳐 협동조합을 만들었어요. 방과후 아이들을 돌보는 상상놀이터를 꾸렸습니다. 아이들에게 다랭이논 생태농업을 가르치고, 노인들의 마당에 작은 텃밭도 조성합니다.

대한민국에서 이 협동조합이 그리는 마을이 가능할까요? 이틈에 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일 년 뒤 나는 이 이사장을 ‘모든 돈 안 되는 것들의 대표’라고 부르며 괴롭힙니다. 그의 몸에 사리 몇 개쯤은 만든 것 같은데, 아직 분이 다 풀리지 않았어요. 발목까지 내려앉은 그의 다크서클만 아니었다면 사리를 눈으로 확인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여간 그는 불과 넉 달 만에 난리 발광을 친 제 폐악 덕분에 온화한 부인을 향한 감사의 마음이 더욱 깊어졌으니, 피해자만은 아닙니다.

1년 전 인터뷰 때 내가 꽂힌 건 사실 이 부분이었어요. “마을이 느슨한 확대 가족이 돼야죠. 혼자 살기 힘들어진 노인이 친구들, 마을 젊은이들과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요양원은 마을 단위로 만들어야 합니다.” 곧 50대가 되는 1인1견 가구인 저는 마을이 절실했습니다. 만나려면 족히 1시간은 지하철을 타야 하고 그나마 약속 잡기도 힘든 친구들은 관계의 자양강장제일지언정 일상적 밥은 되기 힘들었어요. 급할 때 개를 맡기고, 코로나로 뻗었을 때 먹을 걸 나눠주는 이웃을 갖고 싶었어요. 혼자 사는 푸우는 만날 행복하다잖아요? 문만 열고 나가면 같이 놀 돼지 피글렛, 당나귀 이요르가 있으니까요. 아무도 푸우한테 바지를 안 입을 거면 살이라도 빼라고 하지 않으니까요.

그런 느슨하고 촘촘한 연결망이 있다면, 저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 거 같았습니다.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책 <타인에 대한 연민>에서 그랬어요.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은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고. 모든 에너지를 끌어모아 자신을 지키려하니까요. 두려움의 원인을 타자에게 투사하거나 통제해 풀려 한다고. 지난 삶을 돌아보면, 저는 무서워서 생떼로 타인을 통제하려 드는 어린아이가 아니었을까 싶었습니다. 그리고 늙어가는 저는 반드시 더 약해질 거예요.

이종수 이사장, 다시 말해 ‘모든 돈 안되는 것들의 대표’는 인터뷰에서 마을에 책방을 만들려 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책방 알바할 게요!” 그때는 그 책방을 제가 만들어야 한다는 걸 몰랐어요. ‘책방에서 커피 마시고 책도 읽고, 오후엔 해변에서 수영도 해야지, 최저임금 받으면서.’ 이런 알량한 꿈을 꿨더랬습니다.

일 년 뒤 이 꿈 중에 실현된 건 커피밖에 없어요. 커피는 정신을 두드려 깨우려고 퍼마십니다. 넉 달 동안 책은커녕 뉴스도 못 봤습니다. 이제 제 롤모델이자 위인은 세상의 모든 자영업자입니다. 동네 슈퍼만 가도 경외심이 들어요. 대체 이 사장님은 이 수많은 결정을 어떻게 했을까? 자영업자야말로 회계, 인테리어, 마케팅, 영업을 모두 아우르는 이 시대의 종합 예술인이자 지식인입니다.

▲은모래마을 책방

남해로 이사 온 첫날 밤, 저는 낯선 방에 누워 핸드폰으로 포털에 옛 고양시 주소를 쳤어요. 지도 위 한 점을 바라봤습니다. 울컥 그리웠어요. 거기 살 때, 외로웠습니다. 고립감이 엄습해온 어느 날, 선잠이 들어 꿈을 꿨어요. 제가 물에 빠졌습니다. 머리 위로 살얼음이 끼었어요. 그 위로 햇살이 어질어질 비껴들었습니다. 숨이 막혀 발버둥을 칩니다. 꿈에서 깨 생각했던 거 같아요. “할 수 있는 걸 해! 얼음을 쳐! 그냥 살얼음이야!”

저는 얼음을 깨고 물 밖으로 나왔을까요? 잠들려고 뒤척였습니다. 상주면 인구 1600여 명 중 제가 아는 사람은 ‘모든 돈 안 되는 것들의 대표’밖에 없었습니다. 친한 사이도 아니고요. 저는 수도권 밖에서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싫건 좋건 익숙한 공간엔 체온이 있어요. 퇴근 시간 후미등 붉은 불빛이 빼곡했던 거리, 만원 지하철에서 났던 짜증까지 익숙한 것들이 주는 아늑한 느낌이 있습니다. 밤이면 편의점도 문을 닫는 이 마을에서 첫날 밤, 저는 어느 때보다 혼자인 거 같았습니다.

반려견 몽덕이의 배를 만졌습니다. 몽글몽글해요. 4년 3개월 전 몽덕이가 처음 제게 왔을 때, 태어난 지 두 달 된 이 개는 산책을 거부했습니다. 작은 개에게 세상은 너무 컸으니 무서웠을 거예요. 간식을 깔아놔도 현관문 밖으로 한 발 내디디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현관문 앞에 가부좌로 앉으니 몽덕이가 그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앉은 채 엉덩이로 밀며 조금씩 복도 쪽으로 이동했어요. 몽덕이는 제 무릎에 의지해 세상 밖으로 나왔습니다. 이제 저는 이 개에 의지해 낯선 세상으로 나갑니다. 몽덕이가 아니었다면 남해행을 결정하지 못했을 거예요. 누구에게나 다른 존재의 무릎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 남쪽 끝에서 애증의 ‘무릎’들을 만나게 됩니다.

글·사진: 김소민 은모래마을책방 지기·희망제작소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