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벌과 발달장애인 그리고 이웃들의 ‘동반 비행’

양산 비컴프렌즈 김지영 대표

위 그림이 무엇으로 보이나요? 이 작품을 만든 장은혁(15) 작가의 답은 이렇습니다. “뱀이야!” 뱀은 음흉한 동물이라는 고정관념을 사뿐히 지르밟는 작품이죠. 장 작가가 색종이를 오려 붙인 것입니다. 발달장애인인 장 작가가 감정을 표현할 수 있도록 어머니 임미연 씨는 종이와 가위를 줬어요.

지난해 장 작가의 개인전 ‘샥둑샥둑 가위로 들려주는 수다’ 전시가 열렸습니다. 사회적기업 비컴프렌즈가 벌이는 발달장애인 예술가 양성 프로젝트 ‘비 마이 프렌즈(Bee my friend)’ 가운데 하나입니다. 지난 3일 친환경 비(bee) 카페 오봉살롱에서 만난 김지영(54) 비컴프렌즈 대표는 자기 핸드폰 첫 화면에 담은 이 귀여운 뱀을 보여줬습니다.

2017년 겨울, 발달장애인 아들을 둔 김지영 대표는 양산시 사회적기업 아이디어 공모 플래카드를 보고 이 이름을 떠올렸습니다. ‘비컴프렌즈(beecomm friends=bee+communication, community+friends)’, 꿀벌과 소통하는 친구들, 그리고 그 친구들과 친구 맺는 커뮤니티. 교육방송에서 꿀벌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본 직후였습니다.

그의 머릿속에서 도시양봉과 발달장애인이 만났어요. 그 많던 꿀벌은 어디로 갔을까? 기후위기, 미세먼지 등으로 꿀벌들은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죽습니다. 2010년 돌림병이 돌아 국내 토종벌의 90%가 사라졌습니다. 꿀벌이 사라지면 작물의 3분의 1은 열매 맺지 못합니다. 꿀벌이 사라진 곳에선 사람도 살지 못합니다. 도시양봉이 필요한 이유죠.

발달장애인들은 어디에 있을까요? 국가인권위원회 조사 결과를 보면, 2017년 기준 시설 거주자 가운데 78%가 발달장애인이입니다. “한국은 발달장애인에 대한 이해가 너무 부족해요. 만나기 어렵다 보니 (비장애인들이) 발달장애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요.” 발달장애인이 도시양봉을 직업으로 삼는다면? 생산한 꿀로 가공품을 만들어 팔고, 도시양봉 교육도 벌인다면?

“장애인들끼리 모여 볼펜심 끼우기처럼 반복적인 일만 하는 게 안타까웠어요. 공익에 도움이 되고 이웃과 함께 할 수 있는 활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발달장애인과 도시양봉이 잘 맞을 것 같았어요.”

책 <패턴시커>의 부제목은 ‘자폐는 어떻게 인류의 진보를 이끌었나’입니다. 자연계 놀라운 패턴을 발견한 과학자 중엔 시각적 기억력이나 관찰력이 뛰어난 자폐성 성향이 짙은 이들이 많답니다. 김 대표는 도시양봉과 발달장애인을 연결한 이 아이디어로 덜컥 최우수상을 받았습니다. “이제 진짜 벌 키워야 하나?” 서울에서 광고 기획자로 20여 년 일한 그는 벌을 키워본 적이 없었어요.

▲ 김지영 비컴프렌즈 대표

2017년 겨울방학, 서너 시간이라도 아이를 맡길 곳이 없었습니다. 양산엔 장애인복지관에서 운영하는 계절학교가 발달장애인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는데 신청자가 너무 많아 추첨을 했어요. 김 대표가 치료실에서 만난 6명은 모두 떨어졌습니다. 하루 서너 시간을 확보하지 못하면 부모는 마트도 가기도 힘듭니다.

화가 난 6명은 공동육아를 시작했습니다. 하루는 요리하고 하루는 박물관 가는 식이었죠. 비컴프렌즈의 교육프로그램인 ‘뭐든학교’의 씨앗이었습니다. “공동육아를 하다 보니 ‘내 아이 어떻게 하지’에서 ‘우리 아이들 어떻게 하지’로 고민이 확장됐어요.” “내가 무슨 사회적기업이냐” 하던 6명은 “내 아이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판을 한번 제대로 벌여보기로 했습니다.

10년 이상. 누군가는 경력단절 기간이라고 하겠지만 그들에겐 “누구보다도 발달장애인에 밀착해 치열하게 공부한 시간”이었습니다. 서류에 쓰려고 이력서를 받아본 김 대표는 울컥했답니다. 사회복지, 미술치료, 바리스타… 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부터 다들 뭔가를 공부하고 있었어요. 그들의 연대는 7년째 깨지지 않았습니다. 비법 가운데 하나는 5년 동안 받은 집단상담 ‘자분자분’입니다.

“처음엔 아이 이름만 나와도 다들 울었어요. ‘시부모가 나 때문에 애가 이렇게 됐대’ 이런 사연들을 쏟아내요. 자분자분 클래스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분리’예요. 아이는 나 혼자 오롯이 짊어지고 가야 할 짐이 아니에요. 엄마가 자신다워질 때 아이에게도 더 큰 행복을 줄 수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모두 다른 우리는 서로 존중하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에 이 공동체를 유지할 힘이 생겼습니다. 우리는 공통점을 찾지 않아요.”

멤버들은 각자 장기를 키워갔습니다. 그런데 꿀벌은 어떻게 키우지?

“내가 벌을 30~40년 동안 키웠는데도 아직 공부가 부족한데…발달장애인은 절대 못 해요.” 김 대표가 물어물어 찾아간 한 양봉가에게 들은 말입니다. “오기가 생기가 생기더라고요.” 꿀벌 세 통을 사서 시작했습니다. 첫해 겨울이 오기 전 어느 날 아침, 벌통 다섯 통이 모두 비었어요. 말벌 탓입니다. 비컴프렌즈 멤버들은 거의 독학으로 꿀벌에 대해 알아갔습니다.

그리고 6년 뒤 그와 인터뷰하는 도중 그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 왔습니다. 한 주민이 벌집을 발견했는데 꿀벌집인지도 모르겠다며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어요. 말벌집은 없애지만 환경지표종인 꿀벌은 보호해야 합니다. 꿀벌에 대해 배운 동네 주민은 그걸 알고 있었습니다. 비컴프렌즈는 동네 목공예가가 만든 꿀벌장을 들고 출장 교육도 벌입니다. 오봉초등학교 옥상엔 비컴프렌즈의 벌통이 있습니다. 이 초등학교 ‘허니봉봉’ 동아리와 함께 관찰하고 돌봅니다. ‘허니봉봉’은 장애·비장애 구분 없는 통합동아리예요. “동아리 활동 시간에 발달장애아들은 보통 특수반에 내려가요. 동아리 활동에 참여하지 못하는 게 안타까웠어요.”

비컴프렌즈가 벌이는 모든 활동의 기본은 ‘통합’입니다. “장애아이들이 차별받기 시작하는 곳이 학교예요. 상처가 많아요. 정말 많아요.(김 대표는 잠시 말을 멈췄다.) 학교에선 장애아이들이 수업에 방해 되면 분리해요. 학년이 올라가 학업이 중요해질수록 심해져요. 같은 반에서 교육받을 수 있도록 고민하는 시스템은 부족해요. 그래서 학교가 못하는 통합교육, 마을에서 해보자고 한 거예요.”

통합교육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같이 놉니다. 비컴프렌즈의 교육프로그램 ‘뭐든학교’ 첫해, ‘슬기로운 놀이터’라는 이름으로 매주 토요일 놀이터에서 그냥 놀았습니다. 소주병, 담배꽁초가 굴러다니는 낡은 놀이터였습니다.

“발달장애아이를 둔 부모들은 놀이터 가는 게 힘들거든요. 다른 부모들한테 한 소리 들을까 봐 두려운 거죠. 그냥 우리끼리라도 대놓고 놀자고 한 건데 신기한 경험을 했어요.”

비장애아이들도 하나둘 모여들었습니다. 여름엔 같이 수박화채를 만들어 먹고, 가을엔 낙엽을 주워 물감을 칠하고 천에 찍었어요. 놀이터에 스크린을 걸고 영화도 봤습니다. “동네 식당 사장님이 떡 돌리고 전기도 끌어다 줬어요. 저희가 꿈꾸던 통합교육이 놀이터에서 일어난 거죠.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이 친구랑 어떻게 하면 잘 놀 수 있을지 알아요.” 11월 피날레 파티 땐 마을주민 100여 명이 모여 잔치를 벌였습니다.

▲ 아이들이 둘러앉아 수박화채를 먹는 모습

아마도 당신은 이 그림을 보면 놀랄 거예요. 도시 위로 까만 밤이 내렸습니다. 밤하늘에 색색깔 폭죽이 환희처럼 터집니다. 초등학교 4학년 장애·비장애 아이들이 함께 그린 작품입니다. 마을의 재주꾼들이 선생님으로 참여하면서 ‘뭐든학교’ 수업도 다양해졌습니다. 바느질, 제빵, 가죽공예… 물론, 다 통합교육이죠. 400여 명이 모인 온라인 밴드에 수업 일정을 올리면 5분 안에 마감됩니다. ‘뭐든학교’는 지난해 사회적협동조합으로 인가받았습니다.

2022년 11월, 파자마를 입은 아이들이 신문을 들고 무대에 올랐습니다. 비컴프렌즈가 꾸린 극단 ‘뭔들’의 첫 공연 ‘나는 찢었다’입니다. “영어책 덮고, 국어책 펴고…언제 어른이 되는 걸까?” 그러다 아이들이 놀기 시작합니다. 아이들이 관객석으로 던진 큰 천이 어른들 머리 위로 지나갑니다. “와~.” 장애인, 비장애인, 아이, 어른 다 같이 풍선을 받아치며 신났습니다. 비컴프렌즈와 뭐든학교는 장애·비장애 통합문화예술단을 시작으로 올해 지역 여러 기관과 협력해 통합축구단도 만들었어요.

통합은 세대를 넘어 확장됐습니다. 잭슨 폴락 작품인가? 오봉살롱 입구에 걸린 대형 그림을 보면 이런 생각이 떠오를 겁니다. 호쾌하게 흩뿌린 색색깔이 어우러진 이 그림이 김 대표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지난해 말 여섯 살부터 예순 살까지 12명이 모였습니다. 서로 별명을 부르며 평어를 썼어요. 천막 천 위에 캔버스를 깔았습니다. 애 어른 할 것 없이 양말 벗고 바지 걷고 물감을 뿌리고 찍었습니다. 오봉살롱의 대표작은 그렇게 탄생했어요.

“장애인뿐 아니라 노인도 사회적 활동하기 힘들잖아요. 늙고 몸이 힘들면 다 요양원 가야 할까요? 또 일상에서 자기가 선택하는 경험이 발달장애인에겐 부족해요.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는 마을이 중요한 거죠.”

2017년 서울에서 경남 양산으로 이사 온 그는 이런 연결이 일어나도록 1층에 친환경 비카페 오봉살롱을, 2층엔 자신과 비컴프렌즈 멤버 중 한 명인 박유미 씨 가족이 살 집 두 채를 올렸습니다. 2층 살림집 두 채의 이름은 ‘호우시절’, 한 채엔 김 대표가 살고, 다른 한 채는 지금은 도시 양봉을 경험할 수 있는 스테이로 운영 중입니다. ‘뭐든학교’ 사회적협동조합의 이사장인 박유미 씨네는 ‘뭐든학교’가 커지면서 새로 지은 건물로 이사했어요.

“워커홀릭” 광고·전시 기획자였던 그의 삶은 39살에 첫 아이를 낳고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아들은 남달랐어요. 돌도 되지 않아 알파벳과 도형을 구분했습니다. 아이가 20개월 때 어린이집 원장이 그에게 시시티브이(CCTV) 화면을 보여줬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함께 놀 때 아들은 벽면만 훑고 다녔어요. 치료센터에서는 다들 “엄마가 아이에게 올인해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지금 저는 그렇게 조언하지 않아요. 아이만이 중심인 그 상황이 너무 힘들었어요. 제가 죽을 것 같았어요.” 아들이 다섯 살 때 그는 대학원에 진학해 공공디자인을 공부했습니다. 일자리를 잡을 순 없었어요. 아이가 학교 갈 즈음이 되자 예측불가능한 돌발 상황이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측한 적 없는 방식으로 꿀벌의 경이로운 세계가 그 앞에 펼쳐졌습니다. “벌이 제 스승이에요. 하루 종일 ‘벌멍’을 해도 지루하지 않아요. 조금만 더 알면, 그 귀여운 엉덩이를 보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어요.” 꿀벌은 생애주기에 맞춰 제 역할을 받아들입니다. 제 속도에 맞게 그 역할에 열심이죠.

비컴프렌즈의 발달장애인 두 직원은 부지런한 ‘꿀벌’입니다. 2017년 그가 처음 ‘비컴프렌즈’라는 이름을 떠올렸을 때 한 예상이 맞았습니다. 벌들이 화가 나면 윙~ 소리가 변하는데 이 직원들은 이 변화를 누구보다 빨리 알아챕니다. 비컴프렌즈는 영세 양봉업자들에게서 꿀벌이 꽃물을 먹고 만든 꿀을 사 ‘오봉미엘’이란 이름으로 비누, 스틱꿀 등을 제작하는데, 그때 이 직원들의 ‘강박적’ 정밀함이 빛을 발합니다. 비컴프렌즈는 이들의 경험을 기록해 발달장애인 중심 도시양봉 교육 직무설계(매뉴얼)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어느 날, 오봉초등학교 급식실 나무에 벌집이 매달렸습니다. 꿀벌인지 말벌인지 구별해야 하니 그가 119와 함께 출동했습니다. 꿀벌집이었어요. 119 사다리가 닿지 않는 곳에 있었습니다. 학교 선생님이며 학생들의 결론은 “그냥 두자”였습니다. “‘내가 쏘일까 무서우니 죽여주세요’가 아닌 거예요. 꿀벌이 인간과 공존해야 하는 곤충이라는 감수성이 이렇게 높아졌구나, 보람을 느꼈습니다.” 비컴프렌즈는 꿀벌과 인간,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어우러지는 공간을 넓혀갔습니다. 2020년 10월 경남도립미술관 3층 벽면에 발달장애인 33명의 영상이 뜹니다. 비컴프렌즈의 전시실입니다. 스크린 하나는 비어있습니다. 그 앞에 서면 관객이 34번째 얼굴이 돼 33명과 눈 맞추며 인사를 나누게 됩니다. “안녕하세요.”

▲비컴프렌즈 대표와 멤버들. (임미연 나윤경 김지영 한정숙 박유미, 왼쪽 위부터 시계 반대 방향 순)

2018년 첫 워크숍에서 찍은 사진 속 다섯 명은 활짝 웃고 있습니다. 검었던 그의 머리는 이제 그의 별명 ‘그레이’처럼 회색입니다. 공익과 수익을 다 잡아야 하는 대표 자리가 만만치 않습니다. 윤석열 정권 들어 사회적기업 예산이 대폭 삭감되기도 했죠. “때려치우고 싶을 때도 있지만” 흰색도 검은색도 아닌 회색, 알록달록 온갖 채소를 담은 ‘그레이 샐러드 볼’이 그가 생각하는 그의 역할입니다. “지금 다섯 멤버가 각자 전문성을 살려 5개 조직이 되는 게 제 목표입니다. 우리는 ‘내 아이가’ 아니라 ‘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을 위해’ 변화를 만들 수 있다는 걸 경험했습니다.”

글: 김소민 희망제작소 연구위원 | 사진: 비컴프렌즈